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생애와 음악유산

 

 

진 영 철

 

 

1. 서론

 

J. S.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음악의 성서로 여기고 있었던 악성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바흐를 가리켜 "그는 작은 시냇물이 아니라 크고 광활한 바다라고 해야 마땅하다"(Nicht Bach, Meer sollte er heissen)라고 올바른 평가를 하고 있다. 금년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2)의 서거 250주년을 맞이하여 독일의 모든 크고 작은 도시의 연주장 뿐만 아니라 전국의 교회와 성당에서도 바흐의 작품들이 공연되고 있다. 지난 여름에 뮌헨(München)의 중심가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는 바흐일가의 작품들이 거의 입장료 없이 음악애호가들에게 상연되었고 다른 교회들에서도 바흐의 파이프오르겐(Orgl) 작품을 들을 수 있었다.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 3명의 거장들, 즉 바흐와 헨델(G. F. Händenl) 및 스카를라티(P. A. G. Scarlatti)는 기묘하게도 모두 1685년에 태어났고 바흐는 평생 독일을 떠나지 않고 교회와 연주를 위해 작품을 쓰고 연주하는데 전 생애를 바쳤고 헨델은 영국에 귀화해서 활동하였고, 스카를라티는 이태리에서 많은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였다.

 바흐에 의해서 탄생한 귀중한 음악유산은 200곡이 넘는 칸타타를 포함하여 1000여 곡에 이르고 그 중에서도 <평균율 클라비어곡집>(Wohltemperiertes Klavier),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randenburgische Konzerte BWV. 1046-1051), 4개의 <관현악 모음곡>, <토카타와 푸가>(Toccata und Fuge BWV. 565), <무반주 첼로소나타 제1번>(BWV. 1007), <G 선상의 아리아>1), <바이올린과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BWV. 1014-1019), <이탈리아 협주곡>(BWV. 971), <프랑스 모음곡>(Französische Suiten BWV. 812-817), <영국모음곡>(Englische Suiten BWV. 806-811),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2), <b 단조 미사곡>(BWV. 232), <요한 수난곡>(Johannes-Passion BWV. 245), <마태수난곡>(Matthäus-Passion BWV. 244)은 항상 우리가 방송이나 영화 속에서 다가갈 수 있는 불후의 명작들이다. 특히 바흐가 라이프치히(Leipzig)의 토마스 교회에서 1727년에 발표한 <마태수난곡>은 금년에 서거 100주년을 맞는 철학자 니체(F. Nietsche)도 기독교의 신을 부정하였음에도 한 주일에 3번이나 들었다는 작품으로 만년의 <음악의 헌정>(Das Musikalische Opfer. BWV. 1079) 및 <푸가의 기법>(Die Kunst der Fuge BWV. 1080)과 함께 바흐가 인류에게 남긴 값진 유산이다.

바흐의 생애와 그가 남긴 작품들을 성악곡(칸타타)와 독주곡 및 실내악곡으로 나누어 먼저 살펴 본 뒤에 바흐에 대한 시인들의 찬사들을 약술하려고 한다.

 

 

2. 바흐의 생애와 예술작품

 

막스 레거(Max Reger)는 바흐의 음악을 모든 음악의 "시작이며 끝" 이라고 극찬했고 심지어 공산주의자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마저 <마태수난곡>에 도취되어 "더이상 감미롭고 부드러우며 감동적인 작품은 없다"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바흐의 최초 전기작가인 포르켈(Johann Nicklaus Forkel 1749-1818)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우리에게 남긴 작품들은 다른 민족이 결코 누릴 수 없는 귀중한 국가 유산이다" 라고 장담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바그너(Richard Wagner)는 <니벨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속의 영웅들의 반유태주의를 위해 토마스 교회의 성가대장인 바흐를 이념적으로 오용하고 있다. 바그너는 그의 <음악 속의 유태민족>(Das Judentum in der Musik)에서 바흐의 유태계 재발견자인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Bartholdy)를 다른 모든 유태인처럼 표현능력이 없기 때문에 바로크의 거장을 모방할 뿐이라고 혹평한다. 아도르노(Theoder W. Adorno)는 "바흐를 집중해서 계속 들은 뒤에 베토벤의 음악을 듣게 된다면 마치 일종의 경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이 들것이다"라고 바흐를 무척 옹호한다. 바흐의 유산이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와 베버를 (Anton Webern)의 12음계법의 기초가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 바흐의 생애

 

어린 요한 세바스티안에게는 미래의 직업을 선택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바흐의 일가친척은 원래 독일중부에 위치한 튀링겐지방에 거주하는 연주자들로 마을의 결혼식이 있을 때나 영주의 궁정에서 바이올린을 켜거나 교회의 오르겐을 연주하면서 생활하고 있는 넉넉하지 못한 집안들이다.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6째 아들로 태어난 요한 세바스티안은3) 라틴어학교(Lateinschule=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1년에 한 번 모든 친척들이 모여 잔치를 할 때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가 9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를 잇달아 잃게 되어 오르트루프(Ohrdruf)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있는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Johann Christoph)에게 위탁된다. 큰형은 장차 교회 오르겐 주자로 활동할 수 있도록 오르겐 연주법과 음악이론을 어린 동생에게 가르친다. 부모를 잃은 슬픔이 어린 바흐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었는지는 기록된 것이 없으나 죽음에 대한 계속되는 불안이 그의 내면생활 한 복판에 틀림없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바흐는 두 명의 부인들과의 사이에서 무려 20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 중 10명은 2-3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바흐가 1707년 22살 때 결혼한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바바라(Maria Barbara)는 6촌 누이동생으로 그녀와의 사이에서 7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나 3명만 성장했을 뿐이다. 바흐가 영주를 칼스바트(Karlsbad)로 모시고 가는 동안에 그녀는 35세 나이로 갑자기 죽었으며 약 1년 반이 지난 뒤 1722년 12월에 바흐는 안나 막달레나(Anna Magdalena) 와 재혼해서 13명의 아이들을 갖게 되고 그 중 7명만 성장한다.

바흐는 뮐하우젠(Mühlhausen)과 할레(Halle) 등지에서 오르겐 주자로 일하다가 1714년에 바이마(Weimar) 궁정악장으로 임명된다. 그 후 그는 1717년에 쾨텐(Köthen)의 영주 레오폴트(Leopold)의 초청으로 궁정작곡가로서 일했고 마침내 1723년부터 1750년에 죽을때까지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교회 성가대장으로 활동하면서 창작에 전념한다. 유명한 토마스 교회의 소년합창단을 이끌면서 거의 매주 예배용 칸타타를 한 곡씩 작곡해야만 했다.4)

이처럼 바흐는 바로 신의 실체를 증명하고 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평생을 음악에 바쳤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2) 성악곡 (칸타타)

 

오늘날 독일인의 음악생활은 바흐의 칸타타 없이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독일의 방방곡곡에 있는 교회에서 주말에 열리는 교회연주의 레파토리는 바흐의 칸타타가 항상 중심이 되고 있다. 이 같은 연주회가 수없이 열리고 음악을 사랑하는 서민들이 연주장을 가득 메우는 한 독일은 참된 음악문화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바흐가 활약하던 18세기 전반에도 이 같은 상황이었다고 추측할 수가 있다. 그러나 당시의 바흐의 칸타타는 오늘날처럼 연주용으로 쓰이기보다는 매주 일요일이나 축일예배의 일부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었고 몇 시간이 걸리는 당시의 예배를 장식하는 바흐의 칸타타는 작은 파리(klein Paris)로 자처하던 라이프찌히의 시민에게는 두터운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요소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군주인 작센(Sachsen) 선제후 등의 탄생일이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서도 칸타타가 연주되었다. 당시 라이프찌히에서 유행하던 카페하우스에서는 바흐가 직접 지휘하는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이 협주곡뿐만 아니라 칸타타도 연주한다. 이 같은 칸타타를 <교회 칸타타>와 구별하기 위해 <세속 칸타타>라고 부르고 있다.

바흐의 생애 중 칸타타가 점유하는 비중은 너무나 크다. 바흐의 사후에 나온 밋츨러(L. Ch. Mitzler, 1711-1778)의 추도기에 의하면 바흐는 약 300곡의 칸타타를 작곡했다고 한다. 바흐는 뮐하우젠시대(1707-1708)로부터 바이마르시대(1708-1717), 쾨텐시대(1717-1723)를 지나 라이프치히시대(1723-1750)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칸타타를 발전시켰기에 바흐예술의 진수는 바로 칸타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흐가 남긴 <b단조 미사> BWV. 232는 1749년경에 완성되었고 다른 4개의 소규모 미사곡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걸작으로 바흐음악의 모든 요소를 한층 높은 수준으로 결합시킨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며5)“바흐가 30년에 걸쳐 사용한 여러 약식의 백과전서”라고 마샬(Robert L. Marshall)은 평가하고 있다.

바흐는 5곡의 수난곡을 남겼다고 하지만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것은 <요한수난곡>과 <마태수난곡>뿐이다.

바흐의 교회음악을 대표하는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마태수난곡>BWV. 244은 바흐가 죽은 뒤에 1829년 3월에 베를린의 징아카데미가 젊은 멘델스존의 지휘아래 연주해서 바흐 음악의 부활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크게 2개의 부분으로 구분된 것은 바흐 시대에는 2개의 부분사이에 설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1부는 29곡으로 구성되어있고 제2부는 39곡으로 되어있어 전부 68곡의 엄청난 구성이다.

 

3) 독주곡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푸가 예술의 백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뷜로(Hans von Bülow, 1830-1894)가 이 작품을 구약성서에, 그리고 베토벤의 소나타를 신약성서에 비유한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6) 바흐가 괴텐에서 영주 레오폴트의 궁정악장으로 있던 시기(1717-1723)에 바흐의 실내악 및 클라비어곡이 거의 모두 작곡되었다. 15명의 단원을 이끌었던 악장이 이렇게 풍부한 클라비어음악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전부 24곡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모든 곡이 다시“프렐류드와 푸가”의 2개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은 클라비어를 위한 6곡으로 되어있다. 바흐가 라이프찌히로 옮기려는 시기에 그리고 또 새 아내를 기쁘게 해주려는 의도로 이 곡을 썼으며 클라비어를 활용하는 세련미가 보인다. “프랑스”라는 명칭은 아마 가볍고 우아한 느낌이 전체를 지배하고 프랑스적인 감각에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바흐는 실제 프랑스를 가 본 일도 없고 독일의 국경을 넘어간 일도 없다. <영국 모음곡>은 1722년 이전에 작곡된 것으로 18C말엽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지만 그 유래는 명백하지 않다. 바흐가 안나 막달리나를 후처로 맞이했고 행복한 생활을 누렸다. 그녀는 어머니(Maria Barbara)를 잃은 아이들을 잘 돌보는 착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남편의 창작활동을 도울 수 있는 음악적 재능도 갖고 있었다. 바흐가 사랑스러운 아내에게 선사한 2권의 소곡집이 바로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이다.

끝으로 바흐가 1735년에 <클라비어 연습곡집> 제2부에 넣어 발표한 <이탈리아 협주곡> BWV. 971은“이탈리아 취향의 협주곡”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음악의 선진국인 이탈리아의 음악을 연구하고 당시 이탈리아에서 비발디가 완성한 협주곡의 양식을 도입하여 협주곡을 쓰거나 편곡한 것이 이 곡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4) 실내악곡

 

바흐는 일찍부터 음악이 넘치는 베를린에 마음이 끌려 그곳을 방문하려고 노력하던 중 음악광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음악에 열심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대를 받게 되었다. 대왕의 플루트 반주자로써 대왕의 신임을 받은 차남 카를 필립 에마누엘도 만날 겸 1747년 5월 바흐는 포츠담에 도착해서 바로 궁정으로 안내된다.

그는 대왕자신이 준 테마를 즉흥적으로 작곡 연주해서 대왕을 놀라게 했다. 그는 베를린의 신축가극장의 음향효과를 시험한 뒤에 라이프찌히로 돌아왔고 대왕이 준 테마를 카논 5곡, 3성의 리체르카레7)를 작곡하여 대왕에게 바쳤다. 바로 이 창작물이 <음악의 헌정>BWV. 1079로 왕의 테마를 6성의 푸가로 만들고 또한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등을 작곡하여 이 작품 속에 넣었던 것이다.

<푸가의 기법>BWV. 1080은 바흐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테마를 위해 <음악의 헌정>을 작곡한 뒤 하나의 테마를 여러 가지로 변형시키는 노력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다. 1747년에 착수된 이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고 아들 프리데만이 마무리해서 출판했으나 실패했다.

인간이 창조할 수 없을 정도의 정교한 기교로 만들어진 푸가집이 이와 같이 당시에 비참한 상황에 빠진 것은 당시의 사회상황에 맡길 수밖에 없다.

 

5) 바흐와 시인들

 

독일의 어느 시인보다도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 속에 살면서 자신의 대부분의 소설 속에서 바로크음악,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 음악작품들을 묘사하고 있는 작가는 아마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가 토마스 만(Thomas Mann)과 함께 언제라도 사람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헤세는 1959년 아들 브루노(Bruno)와의 대화에서 두 개의 미사곡과 <푸가의 기법>은 모든 시대를 망라해서 서양음악이 만들어 낸 최고의 완벽한 작품이라고 말한다.8)

헤세는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BWV. 565를 듣고 자기의 감정을 다음처럼 시속에 담고 있다.

 

<Zu einer Toccata von Bach>9)

 

Urschweigen starrt... Es waltet Finsternis...

Da bricht ein Strahl aus zackigem Wolkenriss,

Greift Weltentiefen aus dem blinder Nichtsein

Baut Räume auf, durchwühlt mit Licht die Nacht...

<바흐의 토카타에 붙여>

 

태고의 침묵이 응시하고... 온통 주위가 캄캄한데...

구름사이로 뚫고 나오는 한줄기 빛

눈먼 미물은 심연에서 구해주고

공간을 만들어주며 빛으로 밤을 몰아낸다.

 

헤세가 바흐의 <토카타>에 붙인 이 시는 음악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음악이 우리에게 생각게 하는 어떤 모습, 즉 빛의 창조에 관한 모습이다. 그것은 혼돈을 비추는 빛이며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빛이다.

 밝음과 어두움, 육체, 앞과 뒤, 이런 것은 바흐의 음악이 이미 완벽하게 우주적 모습을 하고 있는 동안 다이나믹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10)

 괴테는 바흐의 작품이 그의 사후에 곧 잊혀진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직접 바이마르근교의 베르카(Berka)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슈츠(J. H. F. Schütz)와 자신의 비서 첼터(K. F. Zelter) 그리고 멘델스존으로 하여금 바흐음악을 연주토록 해서 바흐의 르네상스에 크게 공헌했다.11)

 그리고 그는 J. S. 바흐로부터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에 이르기까지 시대순으로 매일 슈츠로 하여금 그들의 작품을 연주시켰고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과 다른 합창곡집을 구입해서 슈츠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기도 했다.

<평균율곡집>에 붙인 괴테의 헌시에서 바하에 대한 그의 경외심을 읽을 수 있다.

 

Lass mich hören, lass mich fühlen

Was der Klang zum Herzen spricht;

In des Lebens nun so kühlen

Tagen spende Wärme, Licht.12)

 

듣게 해주고 느끼게 해주오.

소리가 마음에 속삭이는 것을

생활의 차디찬 나날 속에서

따스함과 빛을 내리시기를.

 

괴테의 이 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1829년 3월에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거의 백년만에 멘델스존의 지휘로 다시 공연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바흐의 르네상스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3. 결론

 

J. S. Bach는 당시의 교육제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즉 연주기교와 함께 이론까지도 섭렵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천재소년은 운명을 개척하고 친척에게 보내졌다. 요한 세바스티안은 모범생으로 월반도 하고 학교 밖에서도 교양을 쌓아 나갔다. 그는 오르겐을 연주할 뿐만 아니라 당시 최대 악기인 오르겐의 개조에 전문가처럼 몰두했다.

그는 영주에게 추가 청구서를 제출하고 통행세에 대한 불평을 쓰는 것이 그의 편지 내용이다. 그는 이태리 여행도 하지 못했으며 괴테처럼 제젠하임의 아름답고 행복한 사랑도 해보지 못하고 오직 비둘기 집에 사는 자녀들의 양육에 매달리는 나날을 보내면서도 독일이 자랑하는 최고의 문화유산을 후세에 남긴 거장인 것이다.

바흐의 왕국, 즉 그의 작품들은 질병, 죄악 그리고 죽음에 인간이 마주칠 때 위안이 되기 시작한다. 냉냉하고 약삭빠른 설교자나 고집쟁이들은 한해가 시작되고 끝나도 <마태수난곡>이나 <b단조 미사>에 심취하는 일이 없다.

바흐의 음악 속에는 신의 실체를 증명하고 전달해 주며 참된 부성과 모성에의 동경을 일깨워 주는 지고의 힘이 담겨있다.

 

 

Literaturerzeichnis

 

 Börner, Peter: Goethe, Reinbek 1964

Geck, Martin: Johann Sebastian Bach, Reinbek 2000

Michels, Volker(Hg.): Hermann Hesse, Musik, Frf. a. M. 1986

Terry, Charles Sanford(Hg.): J. S. Bach, Frf. a. M. und Leipzig. 1999

Walwei-Wiegelmann, Hedwig(Hg.): Goethes Gedanken über Musik. Frf. a. M. 1985

Der Spiegel 24. 07. 2000 Heft 30.     

 

 

각주

1)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제3번>(BWV. 1068)의 제2악장을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2) 바흐는 첫째부인 마리아 바르바라(Maria Barbara)를 사별한 뒤 1721년에 바이쎈펠스(Weissenfels)궁정 악단의 트럼펫 주자의 막내딸 안나 막달레나 뷜케(Anna Magdalena Wilcke)를 후처로 맞이했고 괴텐(Köthen)의 궁정악단의 소프라노가수로 있던 그녀와의 생활은 더없이 행복했다.

3) vgl. Marthin Geck: Johann Sebstian Bach, Reinbeck, 2000 S. 10

4) vgl. ebd. S. 87

5) vgl. ebd. S. 153

6) Hedwig Wolwei-Wiegelmann(hg.) : Goethes Gedanken über Musik. S. 179

7) 즉흥연주를 기보한 것.

8) vgl. Volker Michels(Hg.): Hermann Hesse, Musik S. 211

9) vgl. a.a.O. S. 168

10) vgl. a.a.O. S. 169

11) Hedwig Walwei-Wiegelmann: Goethes Gedanken über Musik, S. 179

12) vgl. a.a.O. S.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