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이체를 통해 본 독일정신

 

 

이 영 수

 

 

Ⅰ. 서론

 

독일 정신사에 있어 문학에서 괴테, 철학에서 니이체는 거장으로 대접받아 마땅하다. 괴테가 1832년에 죽고 니이체가 1844년에 탄생했으니 이들의 개인적 인연은 없다. 이들은 그들의 미래예측에 관한 사항을 앞당기기 위해 그들의 의도를 숨기지 아니했다.

괴테는 자신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 비신자(Nichtchrist)로 니이체는 자신이 안티 크리스트(Antichrist)로 자처하며 인간의 나약함과 언어의 혼란등 시대의 불운을 역사적 증상으로 진단하며 거침없이 자신의 말들을 쏟아냈다.

그들이 산 시대는 각기 다르지만 그들 모두 하나의 언어 하나의 독일정신에 소속되어 독일문화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들의 공통관심사는 인간의 도덕1)이었다. 그들은 생명체인 인간의 삶이 역사적 흐름속에서 그 외면적 측면은 달리하여 여러갈래 쪼개지는 것에 고뇌하면서 공동체의 새로운 가치창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괴테와 니이체는 가장 독일적인 것이 무엇이며, 독일인의 정신기질, 본성, 특징들을 그들이 산 시대적 상황속에서 규명해보려고 노력했다. 여전히 안개속에 머물 수 밖에 없는 독일인의 본성을 그들의 언어와 비판속에서 나름대로 독일정신을 확인해보는 것이 본 논문의 과제이다. 근대사에서 독일인들의 교양, 그들의 교육, 시대적 가치 등을 고려하여 니이체의 담론을 중심으로 독일정신을 확인해보려는 것이다.

 

 

Ⅱ. 본론

 

 

1.문화와 국가

 

1869년 2월 니이체는 아직 박사시험을 치지도 않았는데 공식적인 바아젤대학 초청 교수직을 수락했다. 24세에 니이체는 수업과 교육을 끝내었다. 그의 동창들이 큰잔에 맥주를 붓고 일렬종대로 거리를 행진하며 장난에 몰두할 무렵 그는 높은 지위에 있는 교수신분이었다. 그는 스위스 국적을 얻었다. 나중에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교수직을 그만두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20여 년을 스위스에서 체류하게 된다. 그는 내심 한번도 스위스사람으로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정치문제의 관찰자로서 독일을 더욱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1866년 독일전쟁도 그랬고 쾨니히 그레쯔 전장에서 독일군의 승리에 그는 프로이센의 자부심을 갖고 함께 기뻐했다. 그 무렵 자신이 프로이센 사람이라는 것이 더 없이 자랑스러웠고 그렇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라고 했다.2) 그는 군복무도 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근시 때문에 징집에서 두 번이나 소집면제 되었다. 기병소총수로서 고향 근처의 나움부르크에서 1년간의 지원복무를 마쳤다. 그것도 말에서 떨어져 가슴근육에 상처를 입고 나머지 기간을 면제받았다. 1년간 교수로 정착한 후 독불전쟁에서 이긴 독일의 명성에 접했다. 중립국가 스위스가 그를 지원병으로 받아들여 독일인의 의무를 다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두 달 뒤에 다시 바아젤로 돌아왔을 때 그의 건강은 몹시 피폐해 있었다.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 니이체를 보면 당시의 그의 애국적인 태도는 아주 순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당시 그가 쓴 글에는 정치적인 의견은 없고 전적으로 자신의 내면상황을 전하거나 개인적이고 문헌학적 작업과 관심들을 전하고 있다.

그는 민족주의자는 아니고 전쟁에 참가하는 자신의 고향에 대한 자연스런 애정과 강한 의지를 키우는 쪽으로 진행된다. 프랑스가 쫓기고 시달리는 시기에 그는 이웃 나라에 대한 반 프랑스 입장에 서지는 아니했다. 오히려 이런 소용돌이 속에 상승하는 독일사람들의 모습에서 독일정신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준비한다.

니이체는 쇼펜하우에르와 바그너, 그들의 개인적 만남을 통해 큰 자극을 받는다. 쇼펜하우에르는 인간의 이성을 수단으로 보고 인간이 의지의 맹목적 산물인 충동을 단념할 때 구원을 찾을 수 있다. 즉 자기의지를 포기하고 예술 특히 음악을 통해 구원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바그너와 그의 처 코지마는 젊은 학자 니이체를 좋아하여 서로의 신뢰감을 증대시켜나가 나중에는 그가 가족의 일원처럼 되었다. 그는 바그너의 제자가 된 기분으로 바그너의 작품에 찬탄하고 바그너의 인품에까지도 심취하게 되었다.

 

2. 독일 교육에 대한 비판

 

두 사람과의 만남으로 문화와 음악의 이념에 자극 받아 니이체는 1871년 두 개의 작품집필을 끝낸다.

『음악 정신에서 비극의 탄생』과 『학교교육의 장래에 관해서』가 그것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당시 독일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인들의 비극적 시대에 있었던 인류문화의 정점과 연결하여 새로운 인문주의의 실현을 위해 그리스정신에서 본받아 독일정신의 새로운 탄생을 모색해본 것이다. 『학교교육의 장래』에 관한 강론에서는 독일교육에 관한 비판이 시작되고 있다. 이 글은 독일사람들의 가치관 형성(심리)과 인간의 본성에 관해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교육은 인간형성의 행위다. 인간형성이란 빌딩을 짓듯이 인간을 짓는 인간짓기를 말한다. 빌딩에 설계도가 있듯이 인간짓기에도 기본설계는 그 역사사회가 구현하고자하는 이념의 체계와 일치하는 것이다.

니이체는 자신의 어느 글에서도 온전히 정치의 근본문제를 취급하지 않고 있지만 정치와 관련된 독일인의 교육과 문화전반에 관한 상황을 보고 그의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의 교육론의 핵심은 국가가 국민들의 문화요구에 어떻게 책임을 지며 삶의 요구에 문화는 어떻게 변화되어야하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국가의 형성과정이나 국가의 운영 등은 니이체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국가는 국민정신이 내포하는 정서를 촉진시켜주고, 훌륭한 개인을 만들어내는 범위에서 그 의미가 있다. 이 때 그가 주장하는 천재나 개인은 생성론적 인식론의 관점에서 고정된 시점의 개인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3)을 절대화하기 위한 개인을 말한다. 국가는 개인과 천재를 위한 부양처가 되는 곳에서 국가의 존립을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국가의 건설은 문화의 안식처(Refugium)로서 기능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칸트, 피히테, 헤겔 등 선배들의 국가관, 국가개념, 국가발전에 대해 전혀 감동을 받지 아니했다.

니이체가 라이프찌히에서 젊은 학생으로서 쇼펜하우에르의「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열흘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그의 전존재는 회오리바람에 뒤덮이고 그를 지탱하고 있던 믿음도 동요하고 소멸되어버렸다. 리하르트 바그너와의 만남은 그의 감정의 활력을 무한히 확장시킨 정열적인 사랑의 체험이 되었다. 객관적 정신을 대변하는 헤겔의 철학 국가권력, 종교, 철학의 제반원리가 작용하는 객관적 정신 등은 니이체와는 달랐다. 정신과 현실의 화해, 종교와 국가의 화해, 철학적 지식과 정신의 화해 등은 철학과 기독교를 다르게 해석하는 니이체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물론 니이체가 헤겔을 제대로 이해했느냐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니이체는 음악 위에 국가를 건설해보려는 이상을 품고 바그너의 모든 작품을 염두에 떠올렸다. 그가 생각하는 국가는 민족을 조직화하여 생활양식을 추구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조직에 두었다. 그것은 검증되지 아니한 조직이다. 그러나 이런 조직을 염두에 두고 천재가 자라날 수 있는 바탕, 그 토양을 만들어 내려는 목적을 가진 하나의 조직이 국가이어야했다. 이것은 하나의 이념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국가의 발전이 국민개개인의 성장과는 반대로 나타났고 국가와 천재의 상호관계가 대립으로 국가와 문화가 대립으로 나타났다. 만약 비스마르크가 없었더라면 빌헬름 1세는 퇴위했을 것이고 어쩌면 독일이 진보적인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1862년 독일진보인사들의 패배는 비극적 발전의 시초였다. 독일제국의 창설은 의회 민주주의를 누르고 거둔 승리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4) 학교교육의 장래에 관한 강론에서 니이체의 주장은 민중의 교양을 문제로 삼았다. 국가가 밀고 나가는 주도적 이념은 공개적이든 아니든 순수독일정신과 그 정신에서 파생된 교양과의 관계에 있다. 국가가 교육을 확대시켜나가고 있지만 그 교육은 있는 그대로의 실제와 응용은 제외시키고 위대한 개인의 만들기를 방해하고 있다. 어쩌면 니이체의 개인적 국민교육은 국가의 그것과 일치하지 아니했다. 그는 민주국가를 선호하지 아니한다. 민주국가는 민주의 근본적 원리로 말미암아 인간을 동등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인간의 왜소화를 추진하게되고 나아가 인간정신을 적극적인 정치경향으로 몰고가기 때문이다. 합리적이고 양심적인 리더쉽이 보장된다면 다수결은 가장 비효율적인 합의방식일 것이다. 니이체는 비정치적 독일인으로서 문화의 힘과 정치의 불협화음을 지적하고 있다. 보통 인간은 병든 정치에서 권력을 추구하다가 때늦게 인간정신을 찾게된다. 문화는 정치적인 힘이 약해질 때 그 시대의 문학, 영화, 스포츠, 산업 등이 그 힘을 발휘한다. 야콥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표출된 1870년대의 이런 생각은 독일사정을 의식한 의견이요 니이체의 견해이기도 했다. 니이체가 생각한 국가와 교육의 핵심적 관제는 개체와 전체의 조화,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질서를 하나의 조화로서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했다. 서구가 오랫동안 대립적으로 파악해 온 그러한 문제에서 개체와 전체의 타협적 도식에서 보다 중점이 개체에 주어져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3. 비스마르크의 평가

 

폼메른 출신의 융커가에서 유혹적이며 천재적이고 서슴없는 현실주의자 비스마르크가 나타났다. 그는 유럽의 판세를 희망에 차서 관찰하고 제국건설에 나선다. 그는 진보적인 의회에 자신의 적의를 공공연히 드러내었다. 프랑스에 대항하여 독일군이 승리한 것이나 프로이센의 주도하에 베르사이유에서 독일황제의 대관식 거행이나 지난 1848/49년 방해받은 민족통일 등을 뒤늦게 달성했다. 그는 강력한 정치적 의지를 관철시켜 제국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데 성공한다. 비스마르크의 정책은 프로이센에서 독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며, 프로이센을 독일로 만드는 일이었다. 비록 그들이 대독일국가(독일+오스트리아)의 건설은 포기해야 했지만 독일인들은 민족국가를 편안하게받아들였다. 황제 빌헬름 1세는 새로운 제국의 선두에 선 국가의 상징이자 제국의 주인이었다. 독일 연방을 이루는 각 주는 한정된 자치주의에 머물러 있었지만 중앙 집권적 통일제국의 권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긴장을 고조시켜나가는 국내정치와 모든 것이 정치권력으로 수렴되는 과정에서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삶의 모습은 위축되고 시들어버릴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 군사적 외교적 영광과 젊은 민족국가의 강력한 입지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그럭저럭 견디어나간다. 그 당시 독일은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의 소용돌이를 거치는 사회적 변혁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노괴테가 예언적 언어로 산업화시대의 문턱에 서있다고 말한 기계시대가 이미 막을 올렸던 것이다. 독일의 산업화는 초고속으로 진행되었다. 자연과학, 화학, 물리학 분야의 성공적 성과는 산업기술의 기여로 이루어진 것이다. 알렉산더 훔볼트5)가 자연과학의 전 우주를 개인적으로 통합해 낼 수 있었다면, 형성되는 학문적 우주의 전체에 대한 시각을 잃지 않음으로써 전문가정신과 작업의 분업시대가 열린 것이다.

산업사회의 이론과 실제를 영국으로부터 입수한 독일은 학교제도의 근본적 변혁을 요구했다. 독일고전주의의 교양으로 얻어낸 지적재산을 관리하는 대학과 인문계 고등학교 외에도 기술전문대학, 상업학교도 생겨나게 되었고 이들과 그것에 걸맞는 자격증을 요구하기도 했다. 동등한 자격가치의 요청도 기본적 학문의 바탕에서 그들의 교육을 진행시켜나갔기 때문이요, 전문대학생들의 직업교육을 위해서도 인문주의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양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대학과 기술학교의 전공과목이 달라 대학이라는 외적요인 이외의 내용은 같게 만들 수는 없었다.

독일산업의 진보는 프랑스의 전쟁배상금을 기초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학자들과 기업가들이 어느 나라보다 긴밀하게 공동작업을 하였고 화학산업은 비범한 지식인들이 이끌었다. 오랜 도시의 문벌들은 산업가, 은행가, 대상인 등으로 대체되었고 지방귀족은 새로운 세력들과 결합하였다. 니이체가 활동하던 시기는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1890년까지 국가의 방향타를 쥐고 거둔 소기의 성과였다. 성장하는 젊은 제국이 니이체의 삶의 배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 토양과 삶의 질서가 조화롭지 못한 노재상의 정치는 니이체에게 부정적 요소로 비쳤던 것이다.

 

4. 독일사람들과 괴테

 

“오늘날 인간들은 지나치게 서둘러 대고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산만하고, 힘도 없고 품위도 잃고 오로지 업적과 성공여부의 잣대아래 인간성도 상실하고 있다.”6)

 

괴테가 살아온 고전주의 시대와 과학기술 문명이 전개되는 사회는 많은 혼란이 따를 수밖에 없다. 괴테는 그의 시대가 기술문명으로 대변되는 시대의 도래로 위협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파나마 운하, 수에즈 운하 건설, 브레머하펀(Bremerhaven), 미래의 세계적 교통망 등에 대한 그의 예견은 탁월하다. 그의 예견과 평가가 아직도 우리에게 갈등으로 남아 있다. 현재의 기술과학 문명이 우리를 압도하여 그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상 앞에 일찍이 괴테가 보여준 놀라움을 오늘 우리가 숨길 수가 없다.

니이체처럼 깊이 있게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미 그가 예견하는 바를 고백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독일정신은 획일화되고 조직화되어 엉터리 문화 속으로 사라져버렸다”7)고. 독일적인 것에 깊이 뿌리내린 정신적·정치적 삶의 운명적 괴리는 이미 다가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독일의 현안문제보다는 독일고전주의를 먼저 생각해본다. 괴테와 쉴러의 문화도시 바이마르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전이 있는 정치도시 포츠담 사이에 놓인 거리만큼 문화와 정치의 대립을 생각해본다. 그들은 과거로 되돌아가서 교황과 세속권력 사이에 놓인 루터 시대의 차이만큼 그 대립을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쉴러가 쓴 1801년 『독일의 위대성』deutsche Größe 이란 글귀에 이런 말이 있다.

 

“독일 사람들은 정치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가치를 설정했다. 비록 신성로마제국이 쇠퇴해가도 독일의 품위는 손상 당하지 않고 그대로 있을 것이다.”

 

Abgesondert von dem Politischen hat der Deutsche sich einen Wert gegründet, und wenn auch das Imperium unterginge, so bliebe die deutsche Würde unangefochten.8)

 

쉴러가 말한 독일사람들의 품위란 윤리적 위대성이요, 그것은 민족의 문화 속에 녹아 있는 성격을 뜻한다. 민족의 특성은 그들의 정치적 운명과는 무관한 것이며 정치제국이 다른 체제로 바뀌어 가도 정신적 요소인 문화는 견고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형성되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니이체의 청년시절에 가진 경험이 곧 쉴러의 말로 확인이 된 것이다. 정치적으로 힘이 넘친 시대에 문화는 별로 번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쉴러에게 독일인은 정치적 민족이 아니라 도덕적 민족이었다. 그들의 과제는 철학과 예술이었다. 니이체가 보기에 독일사람들이 더 이상 이 과제를 창조적으로 수행해나갈 수가 없다. 예술 종교 분야에서 주도권을 넘겨받은자연과학이 부상하여 모든 생활분야에서 위협적인 정치화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독일의 위대성은 더 이상 가치도 잣대도 아닌 평면화 되어버린 그 무엇이다. 위대성은 과거의 사실이요 행여 어느 때 생겨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이것이 니이체의 시대적 체험이었다. 자연과학적 설명과 자연과학적 분석 방법, 이것은 시대적 요청이요 계몽주의의 회복이며 나아가 삶의 합리적 요청이었다. 게다가 철학과 예술의 위대한 문화를 방해하고 성장하는 신생독일제국은 문화를 말살하려는 것이 니이체의 경험이었다.

독일제국의 전쟁승리와 국민적 광분이 폭발할 때 니이체는 그 접점에서 절망적인 회의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반시대적 고찰』제Ⅱ부는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즉 군사적 승리는 결코 문화의 승리는 아니다. 정치적 발전의 낙관주의와 흥청거림이 참된 문화와 순수한 독일정신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9) 스위스 국적의 니이체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신중한 관찰을 했다. 독일의 군사적 승리는 진실로 독일문화의 패배라 본 것이다. 독일제국을 위한 독일정신의 축출은 국제사회에서 특히 유럽에서 정신적 문화적 주도권을 상실해버린 것이 되었다.

그는 문화를 힘주어 강조한다. 문화는 민중의 삶을 표현하는 문체의 통일로 규정하고 니이체는 이러한 통일된 문체를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에서 실현되었다고 보았다. 문체의 통일이란 지방소국의 문화적 규범이 전국가적 잣대로 바뀌고 이 기준에 따라 사물을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탈레스에서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에게는 관념과 현상, 사고와 존재사이에 괴리가 없는 내적 통합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론과 삶이 서로 분리되지 아니했다. 그들은 삶과 지식충동을 조화시켜 전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그들의 삶은 분열되지 아니했다. 복잡한 학문의 창시자로서 소크라테스에게 이르러 인간의 삶이 지식과 실제의 이원성으로 분출했다. 삶과 지식이 문제점으로 대두한 것이다. 니이체의 시각에서 보면 소크라테스의 출현으로 그리스의 문화적 통일성이 파괴되고 지식기반 위에 문화를 세울려는 새로운 문화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기반이 서양문화의 흐름을 특징 지워 주었고 이제 19세기 후반이 그런 극단적 단계에 진입했다고 보았다.

니이체는 몰락의 결정적 특징을 힘의 단절로 보았다. 무엇인가 얻어내려는 인간의 이기심(selbstsucht), 국가의 지나친 의욕, 학문의 자기주장, 학자들의 건방진 거동 등이 그 원인이라 꼽았다. 독일인들은 승리한 국민의 일원으로서 스스로 충분한 교양이 있다고 생각하고 허영된 만족심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우쭐거렸던 것이다. 이런 자유분방한 민족적 자부심에 앞장선 비스마르크가 문화적인 국가를 군사국가로 만들어내었다. 니이체가 비스마르크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지만 니이체의 글에는 노재상을 수시로 언급하고 있다. 니이체는 그 정치가의 업적과 개인을 구별하여 칭송하고 있다. 그는 『권력을 향한 의지』에 라이프니쯔, 괴테, 비스마르크의 독일풍을 칭송하고 있다.

독일풍이란 대립 속에서도 단호하며, 유연하면서도 끈질긴 강인함을 일컫는 말이다. 강인함이란 둘 중에 하나만을 취하여 자신을 보존해나가는 확신과 이론을 지칭하고 있다. 비스마르크는 공적인 독일교육에 매달리지 아니하고 자기 나름으로 낙천적이며 교양 있는 사람으로서 니이체의 호감을 사고 있다. 비스마르크의 천재적 독창성과 힘에 넘친 정책 추진능력으로 니이체의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가 “독일제국을 위해 독일정신을 단절”10)시켰다고 니이체는 비판했다. 이런 비판적 평가는 노재상이 독일정신을 제국적인 것으로 격하시켰다는 뜻이다. 니이체가 보기에 독일풍의 민족정신이 한 시대와 결속되어 머물 수 없으므로 이것을 일컬어‘과거문화의 단계로 퇴행’이라 보고 다른 말로 ‘금세기의 병’(die Krankheit dieses Jahrhunderts)11) 이라 칭했다.

독일은 국가적 광기로 말미암아 국가에서 한 지역으로 격하되어 계속 수렁으로 빠져든다고 보았다. 니이체는 『큰 정치와 그 손실』große Politik und ihre Einbussen 이란 글에서 그 특유의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여기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정신의 식물과 그 열매가 거친 국가의 토양에서 희생되어야 한다면 국가의 위대성과 그 힘의 집중이 또 한편 정신적 피로와 민중의 빈곤을 가져다준다면 그 위대성과 힘의 집중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12)

 

‘권력을 향한 의지의 철학자’가 제국의 정치권력을 선두에서 이끌어가는 사람과 투쟁을 선언한다. 비스마르크가 국가우선주의를 내세워 권력을 휘두르고 민중의 힘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대신 그 힘을 결속시켜 나가기 때문이었다. 독일 사람들은 사변적이라 소문이 나 있다. 과연 그들이 여전히 사고하고 있는가? 독일인들은 생각하는 것을 지겨워하고 정신의 힘을 믿지 아니하고 정치는 정신적인 것의 진지함을 소멸시켜나가고 있다.‘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독일은 독일철학의 종말에 이르렀다. 독일철학이 있는가? 독일시인이, 정말 멋진 독일책들이 있는가 나는 이국(理國, 스위스)에서 자문해 본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래 비스마르크가 들어서 망쳐놓은 것이다’라고 니이체는 불평하고 있다.

 

니이체는 괴테를 민족주의를 벗어난 세계인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그를 비스마르크에 대항할 수 있는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로 내세운다. 니이체는 민족주의를 국수주의의 망상과 조국의 어리석은 짓거리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괴테는 여전히 대부분의 독일사람들에게 국경을 넘어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어주는 신선한 자극제로 작용한다. 괴테는 여전히 독일역사에서 “여전한 막간극”13)(ein Zwischenfall)이다. 어느 누구가 1870년대 독일정치에 괴테의 작품하나도 읽었단 말인가? 황녀 아우구스타(Augusta)의 편지에서도 빌헬름Ⅰ세의 부인 마리아 파울로브나(Maria Paulowna)14)의 딸이 황제에게 괴테의 문학과 세계를 소개해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 수 있다. 빌헬름Ⅰ세는 제국이 전부였고 괴테는 읽으려고 하지 아니했다. 그 덕분에 프로이센왕국은 독일이 아니었지만 독일은 프로이센이었다. 그리고 오지리는 대독일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호엔쫄레른 가문의 황제는 어느 누구도 히르쉬그라벤(Hirschgraben)에 있는 괴테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황제는 프랑크푸르트 가까운 홈부르크에 종종 체류했지만 괴테의 집에는 가보지 아니했다. 니이체는 이 시대를“독일의 백치시대”라고 명명하고 비스마르크 시대에도 포츠담과 바이마르의 정신적 거리는 전혀 접근하지 못했다. 정치와 문화의 거리는 정신문화의 분산을 뜻했다. 니이체는 괴테와는 전혀 다른 자극에서 독일의 민족국가 건설에 비판을 가했고 그 증거로 괴테를 들었다. 괴테가 1830년 3월 14일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나폴레옹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린 독일해방전쟁을 두고 저 유명한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는 그 당시의 해방전쟁의 승리는 기뻐했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결코 미워하지 않았다고. 그는 프랑스를 미워할 수 없고 중요한 것은 프랑스국가가 야만이 아니고 문화국이며 또 지상에서 가장 개화한 나라라고 칭찬했던 것이다. 그 스스로 대부분의 교양을 이 나라에서 얻게 되어 그 국민과 국가를 결코 미워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국민의 미움이란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문화가 가장 낮은 단계에 있을 때 국민의 미움은 세고 격렬하다. 그러나 문화수준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그 미움은 자취를 감추고 이웃나라의 불행과 행복을 자기나라의 일로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문화의 단계가 괴테의 천성에 어울린다고 했고 그의 나이 60에 이르기 전에 이런 보편적 생각에 익숙해졌다는 것이다.15)

 

이 무렵 괴테가 쓴 세계문학(Weltliteratur)이란 말에서도 그의 보편성에 대한 이념을 엿볼 수 있겠다. 세계문학이란 자국민들이 쓰는 좁은 범위의 자국내의 민족문학에 대한 대립개념이요 초국가적 문학을 지칭하는 말이다. 세계문학은 곧 괴테가 문학보편성에 의미를 부여한 말이고 그가 최초로 쓴 괴테의 말이기도 하다.16) 이렇게 보면 문화단계의 중요성이나 세계문학의 창조 등으로 니이체가 괴테를 세계시만으로 내세우는 이유를 알 수 있겠다.

 

비스마르크가 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제국은 자본주의의 소유와 국가 통치의 대상인 백성에 대한 교육이 우위에 놓인 사회였다. 니이체는 왕국의 이름아래 장사를 하고 안녕과 복지를 위해 노력하는 시대에 반기를 들고 있다. 모두가 삶에 쫓기며 위험한 생존을 계속하고 있다는 생각에 근거하여 숨가쁜 쾌락을 추구하고 나서는 점에서 이 시대를 비판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반사이익을 기대하는 숨가쁜 사냥에서도 염증을 느끼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홀로 있는 시간과 명상을 싫어했다. 여유로운 시간은 자아를 찾고 자신의 영혼을 되돌아 볼 시간이기도 하다. 그는 일하는 것과 먹고 살기위해 행하는 벌이를 구별했던 것이다. 그는 생계유지에서 인간교육을 문제시하지 아니했다. 생존의 유지는 모든 정신적 종교적 삶을 해체하는 어떤 삶의 정조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생계유지를 위한 상업적 정서를 표현하는 제도를 니이체는 민주주의라 생각했다.

시장에서 인간이 대등한 조건으로 물물교환을 이루는 사회조직이 곧 민주주의였다. 그는 비스마르크 제국을 국민적 주식회사로 여길 뿐만 아니라 동시에 민주적 주식회사로 생각하여 독일제국에 나름대로 투쟁했다. 민주주의자와 소매업자는 그에게 같은 말이었고 모두가 그에게 보통사람의 인간형이었다. 그는 초인사상이나 위버맨쉬의 토양도 바로 이런 보통 사람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중에게 권리는 없고 의무만 주어진다면 독재자나 위버멘쉬는 권리와 의무를 갖는 문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어찌보면 니이체는 민주주의보다는 왕정체제,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는 독재체제, 위대한 초월적 개인을 더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교육을 통한 인간의 평등과 동등권에 관한 민주주의의 구조적 요청을 거부하고 개인의 입법자가 되는 국회나 국민의 대리권을 부정한다. 그는 이것을 자연적 인간의 (Privatperson) 운명적 족쇄 풀기로 표현했다. 사적인간의 족쇄를 풀어준다는 것은 단순한 수단으로서 더 나은 인간을 위한 개인의 독자적 가치를 다르게 인정한다는 뜻이다. 인간을 획일화시키고 동등화한다는 민주주의의 일면 때문에 니이체는 이런 시대적 사조를 거부하고 독특하고 자기만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 개성과 초인의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이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더 선호하고 있다고 하겠다.

 

5. 자유주의

 

인류의 역사는 인간자유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고 헤겔이 말한 것은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헤겔철학의 유심적 관점에서 보면 자유의 증대는 자유의식의 증대였고 현실적으로는 자유를 향유하는 계층이 양적으로 증가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자유의 양적증대는 개체의 존엄성과 독존을 증대시키는 방향이었다.

 니이체가 국민의 주권(Volkssouveränität)을 말하는 곳은 쥬네브의 시민 루소를 염두에 두고 있다. 니이체는 루소의 도덕성을 문제로 삼고 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진실성을 근거로 하여 모든 평범하고 중간자적인 것을 내세워 평등론을 문제로 삼는다.

 

평등만큼 독소가 섞인 이론이 없다. 근세정치의 핵심적 사항이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고 경제가 정치를 압도했다. 근대국가의 주체로서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며 등장한 부르조아 시민계급의 요청은 너무도 당연했다. 문명사의 진보가 삶의 질을 제고하고 인간세상의 평등실현이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이 양자는 현실에서 양립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물론 과학과 산업혁명의 덕분에 평등과 자유의 증대가 대중문화의 근간을 이루었지만 니이체가 살던 19세기는 아직 그 시대를 점치기는 어려운 시기였다. 평등은 그 자체의 정당성이 있기는 하지만 평등이 곧 정당성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이체는 가능하다면 국가권력은 없는 것이 좋다는 논지를 편다.17)

니이체는 루소의 자유국가에 대한 생각을 다르게 이해했던 것 같다. 니이체가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이 사회계약의 전제조건이었다. 자유롭게 태어난 인간의 평등이 니이체의 문제였다. 그의 주장은 같은 것은 같고 다른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의 결론은‘서로 다른 것은 결코 같게 만들 수 없다’18) 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어떠하든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면에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그의 회의적 견해가 숨어있다. 루소와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를 선명하게 인간 세상에 알린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인간이 자유를 수용하여 그것을 견디어 나갈 수 있을 만큼 인간의 성숙에 관해서는 묻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그 당시 부상한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니이체는 자유와 평등사상이 두렵고 이 사상 때문에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이 이념에 속아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함께 자유 평등을 주창해주었다. 하나의 연극으로서 혁명이 괴테를 제외한 훌륭한 정신적 지도자들조차 미혹할 수 있었다고 니이체는 논증했던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자유자체를 위해 인간에게 가해진 족쇄를 풀어주려는 모든 구원자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하고 묻는다.19) 덧붙여 당신의 비뚤어진 충동의 욕망도 자유를 원하고 있는가 하고 묻고 있다. 공허한 자유, 달성한 자유도 거론 대상이다. 그는 긍정할 수 없는 자유, 강요에서 떠나있는 자유는 문제삼지 않는다. 절대적 자유는 죽음일 뿐 니이체의 관심사는 아니다. 그는 자유의 실현, 자유의 품위 등을 묻고 있다. 이 자유의 의미는 자신의 족쇄를 벗어 버렸다는 뜻이다. 자신의 품위도 던져버렸다는 뜻이다. 그의 자유주의 비판은 현대의 민주적 자유개념의 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우상의 황혼』에 나오는 반시대적 인간탐험의 장에 그의 자유에 대한 관념의 글귀가 있다.

 

“자유주의 제도는 이룩되자마자 곧 자유주의적이기를 그친다. 자유주의 제도보다 자유에 해로운 것은 없다. 사실 이 제도가 가져오는 결과는 누구나 알고 있다. 이 제도는 권력에의 의지를 해치며 하나의 도덕원리까지 놓여진 산과 골짜기를 평준화하고 옹졸하고 비겁하고 제 잘난 척하게 만든다. --- 자유주의 그것은 동물로의 전락이다”20)

 

이 경우의 의미는 초인사상에 관한 생물학적 이념을 상기해보면 뜻이 분명해진다. 자유분방한 조직은 나중에 이 조직보다 더 잘못된 자유의 가해자가 없는 세계가 된다. 더 이상 조직으로 기능할 수 없는 세계, 자유의 사회가 아닌 제도적 약육강식의 터전이 마련될 뿐이라는 것이다. 자유주의(Liberalismus)는 짐승 떼와 같은 자유로운(개판의) 인간군상을 만들어 이기적인 무질서의 사회를 만든다고 경고하고 있다.

자존심이 있는 백성들은 결코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조직이나 기관아래에 들어가지 아니한다. 자유 뒤에는 싸움이요, 전쟁이 뒤따른다. 자유의 이름아래 수단으로서 전쟁, 그 전쟁의 예찬이 뒤따른다. 자유롭게 된 사람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이 전쟁이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한 자유주의는 부정적인 자유의 수행자로서 스스로 모순으로 나타난다. 자유주의는 자유롭게 된 사람을 더욱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간을 짐승 떼 같은 인간군상으로 격하시켜 결국은 인간의 자유를 망치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믿는 사람에게 의무를 지우는 기독교 도덕과 마찬가지로 그것과 결속되어 있는 한 인간의 질곡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인간의 노예화를 의미한다. 니이체의 개인적 삶의 족적과 그의 이론은 별개인 것 같다. 그는 스위스의 자유주의 제도 아래서 아주 편안함을 느꼈고 스위스 시민으로서 유럽에서는 광범위하게 가능한 자유를 누렸던 것이다.

 

니이체는 끊임없는 역동과 모순 속에서 자신의 자유를 찾아나갔다. 그의 주도적 이념의 하나는 스스로 변하는 사람만이 니이체 본인과 가깝게 생각했고 자기자신 변해 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정신적이고 정치적인 생활 속에 지금까지 부가된 질서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았기에 도래하는 자유민주주의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여기에 그는 직접적이고도 근본적인 문제를 하나 던진다. 독일의 교육과 문화에 대한 것이 그것이다.

 

6. 독일인의 세계시민성

 

독일인의 교육과 문화에 대한 논쟁은 독일인의 정체성, 독일인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변형되어 나타났다. 니이체는 배교자(Apostaten)의 정열로 역사적, 심리적, 사회적, 윤리적 문제제기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정립해 보려고 시도했다.

독일인의 정체성의 문제는 곧 그에게 자아의 문제이고 자기이해, 자기경험 나아가 자기극복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의 소망과 현실의 부조화는 곧 추진력으로 등장한다. 이 추진력이 독일정신에 대한 생각을 고무시켰다. 소망과 현실, 독일적인 특성에 저항하여 나타난 독일적 충동이 그의 기본적 경험이었다. 이 경험이 다시 유럽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관련을 갖게 되고 나아가 모든 독일적인 것이 초독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독일에 좋은 것은 독일적인 것을 벗어나는 것이다'.(Gut deutsch heißt sich entdeutschen.)21)

우리가 민족적 차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결국 각국의 문화단계에서 생겨나는 차이에 불과한 것이다. 독일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많은 경우 일찍이 외국의 선례였던 것이 많다. 지금 무엇이 가장 독일적인 것인가를 알려고 하면 선량한 독일인의 특성을 극복함으로써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니이체는 순수독일적인 것에서 독일정신을 긍정하고 있다. 독일사람들이 독일적인 것을 넘어서 유럽적인 것, 나아가 세계시민적 상태로 고양되어 감으로써 독일적인 정신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로마가 제2의 고향이 된 빙켈만, 세계시민이요, 바이마르의 주민이 된 괴테, 살아생전 독일 땅에서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그리스를 그리워한 횔더린, 그리스의 명랑성을 그의 음악 속에서 구현한 모짜르트 등이 독일정신에서 나와 세계만방에 독일을 알리는 독일정신의 대표적 사람으로 니이체는 손꼽았다.

1880년대에 쓴 니이체의 유고 속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있다.

“독일사람들이 어찌하다 잘못된 엉터리 기후 속으로 들어왔다. 엉터리 기후란 헬레니즘적 요소이다. 이것은‘남쪽’과의 접촉으로 눈뜨는 것이다. 빙켈만, 괴테, 모짜르트가 그 보기이다.”22)

 

『이 사람을 보라. (에체호모)』에서 그는 바그너와의 만남을 아주 중요한 삶의 계기로 여겼다. 왜냐하면 바그너는 모든 독일적인 탁월한 요소에 반대되는 것을 녹힐 수 있는 해독제로 보았다. 그는 마이스터징어(Meistersinger)23)를 중립적 의미에서 양보할 수 없는 독일적인 것이라 칭했다. 그는 이 음악작품을 독일적인 다양성, 비 형식적인 그 무엇으로 그리고 모두 다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묘한 몰락 밑에 숨겨진 영혼의 충만이요 독일적인 힘이다. 이것은 또 독일정신의 바른 일면이면서도 동시에 배척받는 특징이다. 다양하고도 비 형식적인 측면은 젊고 동시에 낡았으며 지나치게 흐물거리기도 하지만 미래와 결탁해서는 풍부한 요소이기도 하다. 먼 장래에 있을 수 있는 순수 독일적인 정신의 실현을 위해 희망에 차 있는 이 생각은 니이체의 모든 글에 두루 통용되고 있다. 이러한 자기실현은 괴테가 그렇게 살았듯이 독일사람이면서 세계시민이 됨으로써, 다시말해 자신을 능가해감으로써 가능한 정신이다.

이제 독일적인 것을 요약해 보자. 독일적 본성의 융화는 괴테나 니이체가 바랬듯이 세계시민적인 의도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독일정신은 국가적 힘의 확대와 폐쇄적인 문화정책으로 점차 소멸되어 갔고 마침내 뒤틀린 독일정신 속에서 니이체가 바란 독일정신은 없어져 버렸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니이체의 후기 저작물들은 또 다른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는 독일의 과거를 평가절상 시키기 위해 1871년 이후의 독일정신은 결코 부정하지 아니했다. 그는 재차 독일역사와 독일정신사에 나타난 위대한 인간들을 다시 점검해 보았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의 책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란 글이 들어 있다. 여기서 독일의 종교개혁은 카톨릭의 방어작전에 말려 중세로 되돌아갔다고 비판했다.24) 따라서 현대의 개화된 정신과 르네상스를 합일시키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니이체에게 최고의 가치는 고귀함과 이 고귀함에 걸맞는 교육받은 사람들의 자연스런 위계질서였다. 신교목사의 아들 니이체는 루터의 종교개혁을‘농부정신의 반란’이라 칭했다. 왜냐하면 신교도들이(농부) 교회를 통해 교육받고 지식인들이 되어 위계질서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때나마‘개념유희와 피의 결핍’에 대해 철혈정책이나 위대한 정책의 처방을 내렸다면 이것은 니이체가 과거의 독일과 새로운 미래의 독일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이다.

니이체는 칸트의 인식비판을 평가했다. 칸트는 인식에 관계를 설정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해방시킨 제한 없는 인식충동을 칸트가 한정시킨 때문이다. 『서광』에 나오는 금언도 새로운 인문주의의 훌륭한 교육업적을 평가하고 있다. 새 인문주의의 대표자는 쉴러, 빌헬름 훔볼트, 슐라이흐마허, 헤겔, 셀링 등을 그의 몸철학의 잣대로 평가했다.25) 그의 몸철학이란 강인한 생명력과 힘을 내용으로 하여 그들의 역사에 비극적 문화를 열어준 것이다. 그들의 교육목표는 선량한 이상주의였다. 이상주의는 삶의 어두운 면 즉 비극적 양상을 제외한 무엇보다 고상한 것을 추구하는 정신이다. 그는 이것을‘구름 속에 있는 뻐꾸기 집’(Wolkenkuckucksheim)이라 불렀다. 이상주의는 주어진 현실과 받아들여야할 현실 위에 떠도는 낭만화이고, 정신과 삶의 신비화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외국인들에게는 수수께끼 같고 매혹적이며 아주 특징적이다. 그는 이것을 하나의‘병’(Krankheit) 또는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그는 독일정신의 발전과정에 기독교의 영향도 많이 비판했다. 역사적인 권력으로서 기독교는 니이체의 사고영역에서는 독특하다. 기독교로 말미암아 위대한 그리스 문화가 헛것이 되어버렸으며 로마제국을 엎어버렸으며 이슬람의 성공을 방해했으며, 인간의 부흥을 외친 르네상스조차 루터 때문에 망가진 것이라 생각했다. 예수의 이론과 그의 삶에 의미전환을 가져다 준 것은 예수의 도덕성에서 생겨난 것이라 보았다. 기독교의 도덕은 노예도덕이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복수의지(Ressentiment)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기독교 덕분에 민주주의가 생겨났고, 독일어, 민주주의, 기독교는 니이체 가치기준으로 모두 비슷한 것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기독교 교인이 아니지만 제국을 이끌어와서 민주주의 운동의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고 니이체는 평가했다. 현대 민주주의는 기독교의 변환이요 동등권 이념조차 기독교의 이념이요 사상인 것이다.

동등한 인간의 권리, 말 자체로서는 그럴듯하나 잘 살펴보면 허무주의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와 기독교는 동등권 속에서 불평등으로 고민하고 울고 있다. 오늘의 위기도 바로 이 동등권 원리에 포함된 것이다.

 

7. 독일정신

 

니이체는 그의 저서『힘을 향한 의지』에서 오늘의 세계상에 대한 비판과 독일의 정신 또는 독일의 본질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다. 그는 이 비판에서 괴테는 예외로 하고 있다. 오히려 괴테의 논증을 끌여들여 자신의 논의를 강화하고 있다.『선악의 저편』의 내용 중에 「민족과 조국」이란 장(章)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자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독일식의 다양함과 모호함 끈질김이 있다. 독일정신의강력함과 풍성함이 있다. ---

음악이야말로 독일인에 관한 나의 생각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독일은 어제의 인간이면서 내일의 인간이지만 그들에게 오늘이 없다.26)

 

여기 언급한 내용은 오히려 외국에서‘독일인의 깊이’로 또 수준 높은 독일인의 내면성으로 통용되었다.‘독일인의 깊이’를 재는 방법은 그들의 영혼을 생체해부를 해보아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 영혼은 내용과 형식에 따라 실제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여러 개의 다양한 요소가 결합되고 시간이 가면서 축적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막연한 특징은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요, 상호 모순되면서도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다.

장 파울27)은 피히테의 『독일국민에 고함』에서 거짓 애국과 아첨, 과장벽에 분격하여 피히테를 공격하고 있다. 또 괴테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괴테는 그의 화살을 질문으로 바꾸었다. 괴테는 자기주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한번도 명쾌하게 말하지 아니하고 대신 평생동안 교활한 침묵의 대가 노릇을 했다. 물론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과연 괴테는 독일민족을 어떻게 평가했던가? 그는 독일의 해방전쟁 만큼이나 프랑스 혁명도 달갑지 않게 바라보았다. 그가 파우스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것은 나폴레옹의 출현이었다. 그는 인간의 문제를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했다. 그는 자신이 독일인이 아닌 것처럼 독일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겨왔던 것을 과감하게 부정하고 있다.

그는 독일의 정서를“자기 자신과 타인의 약점에 대한 관용”이라 규정했다. 물론 관용은 좋은 것이다. 또 독일인에 대해 어떻게 규정해도 완전히 잘못된 것은 없다. 어쩌면 특징 없음이 독일인의 특징인지 모른다. 독일정신에는 무수한 큰길과 샛길이 있을 수 있다. 그 과정에는 동굴, 지하감옥, 은신처 등이 있고 어떻게 보면 그 규정할 수 없음이 신비에 넘치는 매력이 될 수도 있다.

독일인은 불분명하고, 어슴프레하고 눅눅하고 칙칙함을 사랑한다. 또 바람과 구름을 사랑하고 또 불확실하고 희미한 것을 두고 심오하다고 생각한다. 또 이루어져가는 것, 형성 중에 있는 것도 좋아한다. 어떻게 보면 독일인 자체는 존재하지 아니하고 다만 독일인이 생성되고 발전되어가는 그 무엇만 존재할지도 모른다.‘발전’이란 용어는 수많은 철학용어 가운데 가장 순수한 독일적 창안물이요, 성공적인 낱말이다.28)

니이체는 그의 유고 속에서 이렇게 보충한다.‘훌륭한 독일인이 된다는 것은 곧 자기자신을 독일적이 아닌 그 무엇으로 만드는 것이다’29)라고. 이런 말은 어쩌면 오늘 이곳에서도 그대로 통용될 것이다. 괴테가 이런 말을 듣는다면 그도 니이체 편을 들어주었을런지도 모른다. 먼 훗날 니이체는 괴테의 말“자기 자신과 타인의 약점에 대한 관용”을 가장 독일적인 것이라 한번 더 보충하고 있다. 이것은 정당한 인용이요 증거이다. 독일정신이나 독일사람들에 관한 비판은 니이체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괴테와 니이체는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았다. 두 사람의 사이에 있는 활약시기를 보면 70여 년의 시차가 난다. 두 사람의 생물학적 조건, 정신적 상황, 가치관 등을 고려하면 다른 판단은 너무도 당연하다.

괴테도 살아 생전에 같은 민족으로부터 미움에 찬 거부와 경탄도 받았지만 또 한편 깊은 고독도 체험했다. 10년 연하의 쉴러와 우정관계는 독일인들에게 상당부분 이해와 동의를 채워주어 독일인들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니이체도 어윈 로데와 바그너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 고전문헌학자 로데와의 우정은 오래 지속되었다. 니이체가 로데로부터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우정은 깨져버렸다. 바그너에게 기울어지는 한없는 사랑과 그에게서 얻은 해답은 니이체의 초기의 믿음과 독일문화의 재생에 대한 불신을 그대로 반영해 주었다.

이 우정의 파괴와 더불어 그는 깊은 고독감에 빠져 자신의 고국사람들로부터는 전혀 외면당하고 말았다. 그 만큼 어려움이 그에게 닥친 것이다. 그가 쓴 독일의 문제는 곧 자신의 문제였기에 그 만큼 더 힘들었던 것이다. 모든 독일 사람들이 털어놓은 분노의 자리에 그의 판단을 상대화시켜 보면 이해가 더욱 쉬울 것이다. 이런 상황은 괴테의 판단근거와는 전혀 다른 것들이다. 니이체가 원숙한 사람으로서 문제의 양면성을 고찰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못했던 것이다. 에른스트 보이틀러30)는 독일사람들에 관한 괴테의 적절한 ‘판단’을 평가하여 이 판단(자신과 타인의 약점에 대한 관용)에 만용과 경직성이 들어있다고 평했다. 이 경직성은 니이체에게 더욱 강화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여기서 독일 사람들에 관한 특징, 정신, 본성에 관하여 여러 사람이 의견일치를 본 점이 이채롭다.

 

 

Ⅲ. 결론

 

니이체는 자신의 조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지만 그는 결코 민족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쇼펜하우에르와 바그너의 영향을 받고 젊은 시절의 시대상에 대한 생각을 다진다. 그들의 자극으로 독일음악과 문화 속에 가장 독일적인 것이 들어 있다고 파악한다. 니이체는 독일의 교육에 관한 비판에서 정치를 핵심적 사항으로 파악하여 국가가 국민의 문화요구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요약했다. 국가는 국민의 정서를 촉진시켜주고 훌륭한 개인을 만들어내는 범위에서 교육의 의미를 두고 있다. 또 국가조직은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시켜내는 데에 두고 천재가 탄생하고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국가와 교육의 핵심적 과제는 개인과 국가의 조화,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질서가 하나의 조화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전쟁배상금으로 이룬 독일산업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었지만 니이체는 노재상 비스마르크의 정치를 달가워하지는 아니했다.

니이체는 민족정신이 소멸되어가는 자리에서 괴테를 세계시민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그를 비스마르크에 대항할 수 있는 국민정신의 지도자로 내세운다. 세계문학이란 말을 만들어 낸 괴테를 자국민의 자랑이요 문화단계의 발전과정에서 칭송하는 독일인이 되고 있다.

니이체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평등 등은 인간을 평준화하고 저질화하므로 결코 추구할 최종적 이념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유는 도달하면 상실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니이체는 독일인의 정체성, 독일인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가장 비독일적인 것이 가장 독일적인 것이다.”라고. 또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독일적인 것은 다양하고 모호하면서도 끈질김이 있다. 독일정신에는 강력함과 풍성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언어를 니이체는 괴테의 언어를 빌려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독일인의 특징이란 자기 자신과 타인의 약점에 관해 관대함이 그 최종적 자긍심이라 칭했다. 여러 가지 특징이 많겠지만 그 도달점에 있어 여러 독일 지성인들의 의견일치가 이채롭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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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idegger, M.:Gesamtausgabe Band 44,47,48,50, Frankfurt, 1989.

  Horkheimer, M.:Zur Kritik der instrumentellen Vernunft, Frankfurt, 1986.

                 :Traditionelle und Kritische Theorie, Frankfurt, 1986.

                 :Sozialphilosophische Studien, Frankfurt, 1986.

  Jaspers, K.:Nietzsche, Berlin, 1972.

  V. Gerhardt.:Friedrich Nietzsche, München, 1995.

 

 

Deutschtum durch Friedrich Nietzsche

 

 

Young-Su Lee

 

 

In meiner vorliegenden Arbeit habe ich untersucht, was eigentlich für ein Deutschtum Nietzsche aufgestellt hatte. Natürlich war es nicht wichtig, diese Untersuchungen heute noch gelten zu lassen.

Um diese Untersuchungen zu erreichen, verfolgte ich folgende Punkte.

z. B:  1) Kultur und die demokratische Staatsform

         2) Kritik an der deutschen Bildungssituation nach 1871

         3) Die Beurteilung Bismarcks durch Nietzsche

         4) Die Deutschen und Goethe

         5) Nietzsche gegen die deutsche Gegenwart und für das Europäische, Weltbürgliche

         6) Auseinandersetzung mit dem Deutschen der Vergangenheit.

 

 Unser Ausgangsort ist die Kritik Nietzsches am deutschen Wesen. Es ergebe sich daraus, daß die deutsche Seele nicht wirklich gebaut sei, auch nicht einfach strukturiert, sondern vielfach verschiedenen Ursprungs, mehr zusammengesetzt sei.

Dadurch sei der unfassbare, widerspruchsvolle und unberechenbare Charakter des deutschen Volkes bezeichnet. Deutschtum ist als Goethes "Nachsicht mit fremden und eigenen Schwächen als genau in Anspruch genommen, was Nietzsche unter deutsch versteht.

 

 

각주

1) 괴테는 삶의 질서를 도덕으로 보았으나 니이체는 도덕을 삶의 부정하는 의지로 보고 이것을 디오니소스적이라 칭했다.

2) Hans E. Gerber : Niezsche und Goethe .Bern 1953. S. 129

 

3) Nietzsche (곽복록역) : 비극의 탄생. 범우고전선 17. S. 175

4) 앙드레 모로아(전영애 역) : 독일사. 홍성사. 1990. S. 259

5) 알렉산더 훔볼트 (Alexander Humbolt 1769-1859) : 프로이센 국가관리이며 자연과학자.

6) Hans E. Gerber : a. a. O., S. 133

7) ebenda

8) ebenda

9) 니이체 (임수길 역) : 반시대적 고찰. 청하. S. 11

10) Hans E. Gerber : a. a. O., S. 135

11) ebenda

12) ebenda. S. 136

13) ebenda

14) 부인 마리아는 소녀시절 괴테의 집에 출입하면서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았던 사람이다.

15) Eckermann, J. Peter : Gespräche mit Goethe am 14. 3. 1830. Zürich 1969

16) Richard Friedenthal: Goethe, sein Leben und seine Zeit. München 1963. S. 712  

17) Hans E. Gerber : a. a. O. ,S. 138

18) ebenda : Den Gleichen Gleiches, den Ungleichen Ungleiches

             Das wäre die wahre Rede von der Gerechtigheit   

19) ebenda

20) 니이체 (송무옮김) : 우상의 황혼. 청하 1984. S. 96

21) Hans E. Gerber : a. a. O., S. 140

22) ebenda??

23) 바그너의 작품, 장엄 육중한 현대적 음악작품.

24) 니이체는 르네상스를 참된 그리스정신의 부활로 생각하지 않고 <알렉산드리아적·로마적 고대>라고 야유하고 있다.

25) 니이체 (곽복록 역) : 같은 책 171쪽

26) 니이체 (김훈 역) : 선악을 넘어서. 니이체 전집 7. S. 178

27) Jean Paul (1763-1825) 감수성 풍부한 독일의 소설가

28?? Hans E. Gerber : a. a. O., S. 143

29) ebenda. 144

30) Ernst Beutler (1885-1960) : 푸랑크푸르트 괴테 박물관의 소장이요『괴테 수상록』(Essey um Goethe)의 저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