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의 관립 덕어학교

 

 

김 효 전*

 

 

1. 서 설

 

바벨탑의 붕괴이래 인간은 서로 다른 외국어를 배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사역원이라고 하여 역관을 양성하고 통역관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서구 열강이 한반도를 침략하는 것과 시기적으로 같은 때라고 볼 수 있다. 주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독일어는 보불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한 이후의 일에 속한다.

한국에서는 구한말 시대에 서양 각국의 문물이 소개되면서 독일의 문물도 함께 소개되고 도입되었다.1) 그러면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독일어 교육이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하였는지 당시의 덕어학교와 외국어학교를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2)

 

 

2. 관립외국어학교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외국어의 습득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개화기의 조선은 관립외국어학교(Royal Foreign Language School)를 설치하였다. 먼저 1891년의 日語學校,3) 1894년의 英語學校,4) 1895년의 法語學校, 1896년의 俄語學校, 1897년의 漢語學校 그리고 독일어를 가르치기 위하여 1898년에 德語學校를 설립하였다. 덕어학교는 여섯 번째의 외국어 학교가 된다.5) 이러한 외국어학교는 중국의 同文館을 모방한 것이다.6)

외국어학교는 본래 鑄字洞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校洞, 정확히 말하여 운현궁 맞은편으로 옮겼다. 그 뒤 은언궁으로 합설한다고 보도되었다.

 

● 外校修理着所   外國語學校를 勳洞 前 恩彦宮으로 合設한다 함은 前報에 累揭하얏거니와       該宮을 方今 修理에 着手하얏난대 竣工期限은  兩個月間이라더라.7)

 

이광린 교수가 작성한 도표를 그대로 인용하여 외국어학교의 전체 모습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당시 『독립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외국어학교의 통합을 주장하고 있다.

 

... 황성에 각국어학교가 다섯 곳이요 덕어학교가 설치되면 여섯 곳이라. 그 학교들을 한 곳에 모았으면 첫째로 나라 경비도 얼마가 덜들고 둘째로 각 학교 학도들이 공부를 겸하여 하며, 셋째는 학도들이 많이 교제하여 지식도 더 늘겠고, 넷째로 규율과 의복이 일정하여 착란치 아니할 것이요, 다섯째로 다 동문수학하는 마음으로 형제같이 정이 나서 서로 붕당이 없을 지라. 지금은 그렇지 못하야 혹 학교가 광대한 곳도 있고 협작한 곳도 있으며 규모가 엄한 데도 있고 너그러운 데도 있으며 복식이 학교마다 다르고 각기 당파가 나누어 서로 보기를 타국 사람같이 보니 우리 나라의 본래 당파가 분운하고 싸움으로 인하여 대의를 잊어버리는 악습이 있거늘 이런 악습을 타파하면 문명한 각국 학문을 배울 사람들이 될 것이어늘 그 사람들이 도리어 각국 분당이 되니 이는 국가를 위하여 대단히 애석한 일이라. 그런고로 우리가 바라기는 속히 큰 학교를 실시하야 여러 어학교를 일통하면 여러 가지에 다 유익하고 한 가지도 해는 없을 터이니... (생략)8)

 

[표 1] 구한말의 관립외국어학교   

구한말 관립덕어학교

 

학교명

설치년대

외국인교관명

한국인교관명

제1회

졸업년도

졸업총회수

(1910년까지)

졸업생총수

(1910년까지)

어학

서울

1891년 5월

岡倉由三郞

長島巖三郞

田中玄黃

玄櫶·崔在益

·朴永武·

柳濟達

1898년 1월

本科 11회

190명

1909년 5월

速成科 2회

71명

인천

1895년 6월

岩崎厚太郞

李根浩·崔鼎夏·徐丙協

1901년 6월

9회

63명

평양

1907년 3월

眞藤義雄  太西裕八

樽木末實

 趙 樂 鴻

 羅 榮 坤

1908년 5월

2회

25명

영어학교

1894년 2월

T.E. Hallifax

 (溪來百士)

W.du. Hutchison

 (轄治臣)

R.Frampton

 (夫岩敦)

 

安 嗚 護

尹 泰 憲

金 佑 行

鄭 一 範

 

1903년 2월

8회

79명

법어학교

1895년 10월

E. Martel

(馬太乙)

李能和·安于

商·金漢箕

1906년 1월

6회

26명

아어학교

1896년 5월

Birukoff

 (米柳葡)

韓 龜 鎬

郭 光 義

??

??

??

한어학교

1897년 5월

胡 文 韋

杜 房 域

吳圭信·柳光烈·李命七·崔永年

1901년 7월

9회

59명

덕어학교

1898년 9월

J. Bollighn

 (佛耶安)

秦 秀·崔泰 卿·柳 晩

1908년 5월

3회

5명

출처: 이광린, 한국개화사연구, 137면.

 

외국어학교의 실제 운영 모습을 보면 일어학교와 영어학교처럼 학생수도 많고 또 학생들 스스로도 열심히 공부하는가 하면 반대로 한어학교처럼 학생수도 적고 교사도 열심히 하지 않는 경우도 보도되고 있다.

   

● 漢校零星  각 어학교 학도가 다 사오십명 이상 식이되 한어학교 학도는 불과 칠명이라. 이갓치 군졸한 국고금을 매삭에 슈백원식 비용하야 학교에 쟝취는 전여 긔망이 업시니 탄식할 일이오 또 교사 호문위씨가 근간지 못함으로 학도가 더 영성하다더라.9)

 

● 學員辨明   去 二十四日에 官立 漢語學校 學員 等이 敎官 金元培氏랄 論駁한 寄書가 有하야 本報에 揭載가 대얏더니 今 又 該校 學員이 辨明하되 此난 試驗時 落第者의 私嫌으로 由함이오 金敎官은 彼書所言과 如한 事實이 初無하다더라.10)    

● 金氏免官   漢語學校 敎官 金元培氏난 今番 夏期試驗時에 不公한 事實이 有하야 將次 免官한다더라.11)

 

● 黜學徵金   漢語學校 敎官 金元培氏가 以試取 不公事로 免官함에 對하야 該校 學徒 金泰鎭은 投書報t관에 구날太甚事로 黜學하고 罰金을 徵收케 하라고 該校長이 學部에 報告하얏다더라.12)

 

▲ 漢城日語學校에셔난 日人敎師가 學徒를 亂打한 패擧가 有하고 尙州郡 山陽面 某씨家에셔  雇聘한 日人 敎師난 婦女를 劫奸한 蠻行이 有하얏스니 韓人 學校에 日人敎師 함부로 두지마오.13)

 

각 외국어학교의 교련은 당해 외국어로 가르쳤으며, 別技軍(日淸俄) 역시 당해 외국 어로 가르쳤다.14)

그밖에 외국어학교에 관한 기사는 별로 많지 않은 편이다.

 

각 외국어학교의 학생모집 광고는 다음과 같다.15)

              各外國語學校學員募集廣告

今에 日英法漢德 學校에 學員을 募集할 터이니 入學하기 願하난 者난 來 二月 十日(陰曆 正月 十七日) 內로 稟請증을 各 該校에 具呈하고 伊日 上午 十時에 該校로 來하야 入學試驗에 應할 事

       試驗科目

  一  한文 독書 作文

  一  國文 독書 作文

  一  入學者에 年齡은 十七歲 以上으로 二十五歲까지

  一  各 學校에 入學試驗코자 하난 者난 稟請紙를 本部로 來하야 購用할 事

                           學   部

 

1905년 이른바 보호조약을 체결한 이후부터는 외국어학교 중에서도 일본어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일본어를 배우려는 분위기는 지방 소학교에까지 널리 확산되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우리 현실에 비추어서도 외국어 교육의 문제점과 심각성을 일깨우는 교훈적인 기사를 소개한다.

 

● 語學太早  各 地方小學校에셔 敎授하난 科程을 得聞한則 七八歲된 學徒에게 日語科를 添 入함으로 幼穉한 學徒가 本國 言語도 한熟지 못한 것스로 如此히 敎授하난 것이 頓無進就 之望 뿐더러 學部令에도 初無此等科目이오 且 世界列國에도 小學校에셔 語學科設치함은 頓無한則 此 事件은 學部에셔 從速 歸正하난 것이 妥當이라고 하더라.16)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는 통감부의 압박과 강요 그리고 현실적인 필요성 등을 내세워 더욱 더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1906년 칙령 제40호에 따라서 관립 한성일어학교를 비롯하여 한어학교, 영어학교, 덕어학교, 법어학교 그리고 관립 인천일어학교는 학부 직할학교가 된다.17)

 

[표 2] 외국어학교 입학상황 (1897-1910)

 

                년

 부

광무원년

(1897)

동2년

(1898)

동3년

(1899)

동4년

(1900)

동5년

(1901)

동6년

(1902)

동7년

(1903)

일어부

입학지원자

-

-

-

-

-

-

-

입학자

-

-

10

8

20

16

14

영어부

입학지원자

-

-

-

-

-

-

-

입학자

50

30

20

47

58

53

62

한어부

입학지원자

-

-

-

-

-

-

-

입학자

120

150

141

82

70

52

34

법어부

입학지원자

-

-

-

-

-

-

-

입학자

42

62

73

81

98

100

90

덕어부

입학지원자

-

-

-

-

-

-

-

입학자

-

50

-

-

40

20

20

입학지원자

-

-

-

-

-

-

-

입학자

212

292

244

218

286

241

220

출처: 한국 학부, 한국 교육의 현상, 1910, 40면.

 

덕어학교와 관련하여 독일 문물의 수용이나 보급 문제 등도 함께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18) 여기서는 대한매일신보에 소개된 독일의 국민가를 원문 그대로 소개하기로 한다.

 

德國의 國民歌(別報)

 

在倫敦 鐵脚生

鐵脚生이 일즉 德國 토른에 라난 地方에 遊하다가 農夫와 水夫가 歌曲相和하난 聲을 聞하고 氣가 自奮하며 肩이 自聳하야 耳를 傾하고 靜聽하나 言語를 不解하난 故로 其 歌曲의 意味난 不知하고 但只 山岳을 動하난 歌曲의 音調만 耳에 入하난지라. 鐵脚生이 無限한 遺憾을 拘하얏다가 後에 伯林에 遊할새 又 란街 小兒가 前日과 如한 歌曲을 唱하난지라. 鐵脚生이 壹 友人을 訪하야 其 歌曲의 意味랄 問하고 因하야 記하얏노라.

大抵 此歌난 德國 國民歌니 德國에난 官民老少男女를 勿論하고 恒常 唱和하야 茶飯으로 供하난 歌曲이니 其 歌曲을 聞하더라도 德國이 世界强國으로 東西를 虎면하난 原因이 其 國民에게 在함을 可知하갯도다.

今에 其 歌曲을 譯述하노니 飜譯이 能치 못하며 曲調가 合하지 못하나 다만 其 人民의 勇壯한 氣力과 活潑한 精神을 思惟컨대 此 歌曲을 唱하며 起舞랄 不巳할지로다.

 

德國??民歌

 

(壹)  우뢰갓한소래귀에마쳐

병쟝긔를霹靂갓치부드지며

으라인(國權)으라인德國으라인

뉘가너를防備할고으라인아

後斂  두려말아父母國아

으라인把守여긔잇스니

걱정말아사랑하난祖國아

으라인把守굿게셧다

(二)  勇猛잇난 튜톤民族

여러마음壹체奮發

冒險하기鍊習하야

祖國疆土직히여라

(三)  千萬番죽을지라도

法國百姓을아니될지라

끌난피으라인의洪水되야

英雄의血대德國에가득하리

(四)  놉히보라뎌하날에

九쳔英雄내려본다

世전之物일치마셰다

德國가삼으로방패삼아

(五)  德國피가식기前에

德國環刀무듸지안코

德國砲手銃을들졔

德國따에발부칠敵兵업네

(六)  흘너가난시내물에

有進無進盟誓하고

우리國旗놉히들어

나아가셰으라인으로19)  

 

철각생이란 가명 아래 간접적으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일본인을 배척하여 자주 독립할 것을 촉구하는 글이다.

 

 

3. 덕어학교의 약사

 

덕어학교(Kaiserliche Deutsche Sprachschule; Royal German School)는 1898년 9월 15일에 개교하였다. 황성신문은 당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비교적 상세히 전하고 있다. 전문을 인용한다.

 

⊙ (學校盛宴) 今 十五日 上午 十一點鍾에 德語學校에서 開學하난 禮式을 行한 後에 學部協   辨 高永喜氏와 外國語學校長 洪禹觀氏가 學員을 對하야 其 設學하난 本意를 演說하엿난   대 其要旨를 略記하노라. 高永喜氏曰

大皇帝陛下의 聖意를 밧자와 今日 德語學校를 增設하야 學徒를 敎育케 하오니 如此한   盛擧가 無할 뿐 더러 僉學員에게 매우 緊重하고 審愼할 것이오 歐洲各國語學으로 言하   면 英文은 萬國商會上에 通用하난 語이오 法文은 國際上에 盛用이오 至於 德文하야난    軍法과 軍制에 매우 緊要하야 世界에 第一이라 할만하오. 僉學員은 入學하난 日부터 注   意들 하고 日就月將하야 速速히 成就하야 我 皇上陛下의 聖意와 政府의 深望하난 意와   敎師 쁠쟌氏의 實心 敎導하난 本意를 實行하야 他日 國家의 棟梁되기를 바라오. 洪禹觀   氏 曰 사람이무삼 工夫를 하던지 始終이 如一한 거시 貴하거날 我國人은 매양 有時無終   하야 英語를 學하다가 或 法語도 學하야 一枝도 卒業치 믓하니 심히 慨歎한지라. 此난    無他라. 學徒가 學校에 入할 時에 學問上에난 有意가 少하고 官職에만 意가 有함이니 此   난 敎育上에 目的이아니라. 人人마다 官職에만 意가 有하면 그 官制를 엇더케 擴張하여   야 하리오. 我國 人民에 至하야난 然하기도 容或無怪한 거시 我國이 五百餘年을 仕宦만   重히 녁인 까닭이나 至今은 不然한 거시 仕宦은 信치 못할 거시오 學問은 終身토록 持   하난 거시니 僉學員은 今日에 願學하난 마음을 卒業할 때까지 가져셔 工夫가 成就되오   면 一身만 有益할 뿐이 아니라 政府에셔 國庫金을 損하야 敎育하난 本意와 敎師의 誠心   으로 敎導하난 意를 負치 아니함이오 또 敎師 쁠쟌氏난 日本 高等學校에 九年이나 잇셔   고 名譽가 매우 有한대 今番에 我國敎師로 오기난 月給을 取한 거시 아니오 大韓에 츠   음으로 德語學校를 設始하난 故로 後日名譽를 取하여 온 거시니 僉學員은 誠心을 盡하   야 語學과 行實을 배우시오 하엿더라.20)

 

학부협판 고영희(1849-1916)21)가 말하고 있듯이, 독일어는 군법과 군제에 매우 긴요한 외국어로 인식하고 있었다.

외국어학교장 홍우관은 동문학교에서 수학한 사람이다.22)

볼얀(J. Bolljahn)23)은 당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사 크리인씨는 학교의 설립을 위해서 큰 힘과 인내를 발휘한 사람인데 그는 환영사에서 수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독일어 공부에 전념하려고 한다는 것에 대한 그의 기쁨을 말하였다. 그 다음 그는 공부를 위한 독일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매년 수천명의 외국인들이 예술과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서 독일로 간다는 것과 모든 교양 있는 외국인들은 독일어에 정통하며 지구상의 전체 인구 중에서 열 명 중 한 명은 독일어를 말한다는 것을 언급하고 국가통치자에 대한 축사로 끝을 맺었다. 그와 똑같이 나는 적당한 훈계와 조언으로 끝나는 짧은 인사말을 했다. 영어학교를 나온 나의 조교는 -- 덧붙여 말하자면 학부대신의 아들인데 -- 두 가지 연설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도대체 어떤 한국인도 독일어를 몰랐던 것처럼 그가 독일어 단어를 단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해서 내가 그에게 영어 번역문을 미리 주었기 때문이다.24)  

 

볼얀은 그밖에도 교육내용과 당시의 불안한 정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또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長우生의 「語學을 論함」이라는 寄書(투고)에서는「醫學 軍政을 學코자 하난 者는 독일어를 學하고」라고 하여 독일어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25) 또한 황성신문에서도「我韓學生의게 歐米語의 修養을 勸함」26)이란 논설에서 외국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덕어학교는 처음에는 소안동(현 덕성여중 북쪽 선학원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에 관한 몇 가지의 신문 기사가 보인다.

 

● 德校移接  宮內府에셔 嘉禮都監의 照會를 因하야 學部로 照會하되 嘉禮時에 熟設所를 擬定於 德語學校이니 使之不日移去케 하며 三揀擇日字가 在邇하와 各項排設等節이 萬分時急하니 刻卽知委擧行하라 한바 德語學校를 本府 所管 協律社로 移接하라신 旨意를 奉承仰佈라 하얏더라.27)

 

 여기서 말하는 황태자 전하의 가례일은 1907년 1월 24일이다.

 

● 熟所又移  嘉禮時에 德語學校난  熟設所로 指定하고 該校난 協律社로 移接한다더니 有何層節인지 農商工學校로 權接한다더라.28)

 

● 德校移接  安洞 德語學校난 元來 別宮基地라. 東宮 嘉禮時 熟設問處所를 定하고 해校난 移接於地處하라신 處分을 下하신 故로 宮內府에셔 勅敎를 奉承하야 學府로 移照한 事난 前報에 揭載하얏거니와 해校에셔 근持하더니 宮內府에셔 學部가 屢度 交涉하야 日昨에 始爲移去하얏다더라.29)

 

● 校舍移接  官立漢城法語學校長 리能和씨가 學部에 報告허되 學務局長 指揮를 承하와 昨日에 本校舍를 空虛하압고 現今 즉 德語學校 後邊 家屋으로 搬移하얏삽기 玆에 報告라 하얏더라.30)

 

● 移校熟設  學部에셔 宮內府에 公函하되 官立德語學校을 別宮 熟設所로 借與敎授할 事로 奉承 旨意하얏샤온바 해校 敎育이 壹일 爲悶하와 郡爲移接케 하라 하얏더라.31)

 

● 德校移接  德語學校를 改築할 次로 別宮後 熟設所로 移接하얏다더라.32)

 

● 敦明移接  安洞에 在한 德語學校를 太皇帝陛下 께압셔 敦明義塾에 下賜하심은 前報에 揭載하얏거니와 該塾에셔 日間에 該校로 移接한다더라.33)

 

● 婦女施痘  昨日 安洞 前 德語學校 內에셔 北部 管內 居 婦女와 女兒를 會同하야 牛痘를 施術하얏다더라.34)

 

● 安洞 前 德語學校 內에 本塾이 大東寄宿館으로 移去하고 화測量 壹個月과 夜測量을 增募하야 壹個月 速成 敎授하오니 願學 僉員은 早速 請願을 望함. 中興義塾35)

 

일본 통감부가 자신의 치적을 해외에 선전하기 위해서 만든 시정연보에는 덕어학교 임시종두소 사진에 실려 있다.36)

그 밖에 덕어학교와 관련된 기사를 추출하여 연대별로 나열하여 독일 문물의 수입과정의 일단을 재현해 보고자 한다.

 

⊙ (遊學徒의 挽還) 日昨에 德語學徒 洪顯植 柳僖 兩氏가 日本에 遊學次로 自京發程할 時에 該校中에 具由致書하얏더니 該校 敎師가 學部에 報告하고 仁港 監理에게 電話하야 挽留還京케 하얏더라.37)

 

⊙ (德商의 補助와 支行) 仁川 世昌洋行長 華爾德氏가 堂峴 金광을 視察하고 日前에 入질 하야 本月 十日 頃에 德國으로 進發할 터이라난대 官立德語學校에 一百元을 補助하야 夏期 試驗의 優等生에게 施賞케 하고 又聞한즉 同氏가 徒近한 南大門內에 世昌支行을 派設 하기로 準備中이라더라.38)

 

여기의 세창양행은 H.C.E.Meyer이며, 화이덕은 Wolter를 의미한다.

 

⊙ (賞品補助) 仁川 世昌洋行長 魯伊斯氏가 官立德語學校에 夏期試驗에 上等 金時計 一個랄 賞品으로 補助하고 該行中 裴禹萬氏도 好賞品을 補助하얏더라.39)

⊙ (德校來賓) 昨日 上午 九時에 德語學校에셔 夏期試驗을 行하얏난대 學部大臣 以下 諸官吏와 宮內府 顧問官 山島氏와 德公使가 來會하얏더라.40)

⊙ (德校施賞) 官立德語學校에서 日昨 夏期試驗을 經하얏난대 一班 優等 白禹○ 張錫駿 金時 計 一個試, 二班 優等 金一濟 銀時計 一個, 三班 優等 洪鍾茂 烟嘴 一個오 其外 八人은 坐 鍾 烟嘴 及 洋刀로 分賞하얏더라.41)

⊙ 起送審査  德語學校에셔 討論會事件으로 該 敎官 及 學徒 申興兩氏等이 平理院에 被囚됨은 本報에 己記하얏거니와 日昨에난 日語學徒로 其 討論時에 往參하얏던 申時鎬氏를 審問次 押囚하얏더니 平理院에셔 學部에 照會하되 申興兩等의 案件을 方行審査하난대 審問할 事사 有하니 該校 學徒 李○善 金容愁 崔東壽 等을 指揮起送하라 하얏더라.42)

⊙ 兩姓處役  日語學徒에셔 夏期試驗에 申興雨난 役 三年에 處하얏난듸 亂言知而不告律에 照 하얏더라.43)

⊙ 德校試驗  今日 德語學校에셔 夏期試驗을 設行하난대 德公使 瓦以壁氏도 該校에 來參한다더라.44)

⊙ 德校夏試  昨日 德語學校 夏期試驗에 學部大臣 協辨 學務局長 及 外國語學校長이 齊會하얏난대 德公使 瓦以壁氏와 宮內府 醫士 富彦士氏가 來參하얏더라.45)

⊙ 德醫解雇  宮內府에셔 日本女醫 高橋裕子를 雇聘한 故로 乙往에 延聘한 德國 女醫師 富彦士의 雇聘期限이 洽滿하야 解雇歸國하기로 外部에셔 德公관에 聲明하얏더라.46)

 

독일 공사 瓦以璧은 Weipert이며, 독일 의사 富彦士(분쉬 : Richard Wunsch, 1869-1911)47)는 한국에서 비교적 오랜 기간 근무한 편이지만 그에 관한 한국측 기록은 몇 가지 되지 아니한다.

   

⊙ 德語學校卒業式  官立 漢城德語學校에셔 再昨日에 第一回 卒業禮式을 設하고 李仁植氏等四人의게 卒業狀을 授與하얏난대 學部 學務課長과 參與官이 來參하얏다더라.48)

 

여기서 보듯이 덕어학교는 1898년에 설립되어 1907년에야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49) 그러나 이미 1902년에 덕어학교의 우등졸업생을 교사로 추천한 독일측의 문서50)가 있는 것을 볼 때 그 이전에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따라서 이 기사는 잘못 적은 것 같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세력과 영향이 증대될수록 외국어학교의 학생은 물론 일반 국민들도 일본어를 더 선호하게 된다.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어도 인기가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독일어교육도 약화된다. 마침내 덕어학교에서 일어를 가르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 德校日語  德語學校 總敎師 佛耶安氏난 一般學徒가 日語講習함을 贊成하난 故로 該校內에 日語科를 設치하고 一週間에 數時間式 敎授한다더라.51)

 

한편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 유학생들이 겪는 어려움은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 留學生歸國  年前 學部에셔 留學生 十三人을 選擇하야 俄京에 派送 留學케 하얏더니 日俄 開仗을 因하야 學費를 不爲支撥하고 召還하얏스나 中間道路가 隔阻하야 沈瑛燮氏等 幾人만 歸國하고 其餘난 尙在 俄京하야 困難莫甚이라더니 該 學生 等이 歸國하야  昨日 釜港에 到着하얏다더라.52)

● 兩氏拘引   年前 學部에셔 俄國에 留學生을 派遣하얏더니 日俄開仗 以後에 國交가 絶함의 政府에셔 該 學生을 電조 召還하얏으나 道路阻絶하야 不能歸國하고 流離異域하다가 本年春에 姜漢澤 氏等  七人이 歸國하야 各其 鄕第로 下去하고 姜氏난 其 妹家 李秉常氏家에 來留하더니 再昨에 南署 警務官 金相○氏가 該家에 躬往하야 査問事가 有하다 하고 姜李 兩氏를 警廳으로 拘引하얏다더라.53)

 

다음의 [표 3]에서 보듯이 법어학교와 덕어학교의 입학자 수는 처음부터 많지 않았다. 이것은 독일어의 필요성이 적었다기 보다는 한국과 독일의 관계가 밀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표 3] 한성외국어학교 입학자 수

 

        년

 부

1906

1907

1908

1909

1910

일어부

46

201

250

174

138

영어부

67

97

94

96

106

한어부

47

27

12

17

36

법어부

30

25

3

9

21

덕어부

20

30

18

10

17

                                       출처: 한국 학부, 한국교육의 현상, 40면

 

외국어학교령이 공포된 다음 해인 1907년부터 관립한성외국어학교로 명실공히 단독학교로 발족하였다. 종래의 각국어학교는 각각 일어부, 영어부, 한어부, 법어부, 덕어부가 되었다.

1905년에는 장헌식(1869-1948)이 관립외국어학교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1906년에는 申海永(1870-1909)이 한성 일어학교와 법어학교의 교장을 겸임하였다.54) 1908년에는 일본인 三土忠造가 3개월 동안 교장직을 맡기도 하였는데 이 시기는 외국어학교에 대해서 「상징적인 시기」였는데 그 까닭은 [표 3]에서 보듯이 일어부의 입학자수는 피크에 이르고 다른 외국어부의 입학자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결과 외국어학교는 일본어학교로서의 색채가 농후해지고 외국어학교는 그 존재의의 마저 상실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55)      

 

 

4. 수업 연한과 교과목

 

1895년 칙령 제78호로 제정된 외국어학교 관제에 의하면 일본어와 중국어는 3년이며, 영어, 불어, 러시아어, 독일어는 5년이었다.

덕어학교의 교과목은 다음과 같다.56)  

 

볼얀은 수업내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강의는 말하기, 연습, 쓰기와 읽기, 나중에 받아쓰기 그리고 산수를 포함했다. ... 나는 내가 강의 방법과 시간에 관한 명료한 계약을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매일 4시간 강의가 진행되었다. 한국 학생들은 매우 겸손하고 순종하며 비교적 부지런해서 모든 학생들은 평온한 가운데 똑같이 만족할만한 진보를 하였다.57)  

 

그러나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이후에는 외국어학교의 교과목도 크게 바뀐다. 즉 학과목은 수신, 국어 및 한문, 외국어(일중영불독 중 택일), 수학, 지리, 역사, 이과, 법제, 경제, 부기, 체조, 수의 과목(日英)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다음 기사에서 보듯이 교과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까닭에 올바른 외국어 습득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표 4]

 

 

 

 

 

 

 

 

 

 

 

 

 

 

 

 

 

 

 

 

 

 

 

 

 

● 書籍請撥   南陽郡居 李昌會 等이 學部에 請願하되 本人 等이 英語學校를 設立하온바 敎    科書類가 一未完全이온즉 普通科書與 世界全圖 及 大韓地圖랄 一一撥下하라 하얏더라.58)

 

교과내용은 관보 1909년 10월 23일자 및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27일자 참조.

그밖에 덕어학교에 관한 기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5. 교수진

 

관보를 비롯하여 당시의 각종 신문이나 잡지에 보도된 자료를 토대로 하여 덕어학교에 관련된 인사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독일인 볼얀에 관한 기사를 정리해 본다.

 

(1) 볼얀

 

먼저 1897년 9월 24일 외부대신 閔鍾默이 덕국 영사 크리인(Krien, 國麟)에게 보낸 덕어교사의 초빙에 관한 외교문서는 다음과 같다.

 

1776. 德語敎師의 招聘事(謄 16 冊)

(發) 外部大臣 閔鍾默                              광무 원년(1897년) 9월 24일

(受) 德國領事 國 麟

照會  第14號

 

大朝鮮外部大臣閔種默, 爲照會事, 照得, 本月二十二日, 接准我學部照會, 內開, 敞部直轄學校中,  英·美·俄·法·日·淸 等語學校, 己經設立, 而唯德語者尙未創設立, 德語學校準于來年一月一日開學, 特是延聘德語敎習, 本地覺無應聘之人, 應請貴部, 照會德國公使, 請其相助爲辦, 就近於淸國·日本等處, 代爲延聘德國士人, 來充德語敎習之任, 若是處亦無之, 側請其於德國地方, 代爲延聘德語敎習, 應訂之合同, 卽방照英·美諸語敎習之各合同辨理, 容當將該合同擬就一草, 再請轉送德國公使閔之, 相應備文照會貴大臣, 請煩査照, 轉行照會, 是爲至要, 等因, 准此, 査我學部擬設貴國語學學校, 請聘敎師, 寔屬美事, 諒貴領事亦爲之樂聞相助也, 相應備文照會, 請煩貴, 領事査照, 就揀貴國人士近在於淸國·日本地之員, 추期前來, 以應聘用, 至切禱昐, 須至照會者.

 

이 문서의 내용은 어학교사가 다른 외국어학교는 다 있는데 유독 덕어학교만은 없다. 그리하여 1898년 1월 1일을 기해서 개설하려고 하니 그 이전에 교사를 초빙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며, 가까이 청국, 일본 등지에 있는 사람이면 좋고, 만일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본국에서라도 초빙케 해 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덕어학교의 개교예정은 1898년 1월 1일이었으나 교사초빙으로 시일이 몇 개월 지연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에 대한 크리인(國麟)의 답장은 다음과 같다.

 

1780 德語敎師의 招聘計劃에 대한 照覆

(發) 德國領事 國麟

(受) 外部大臣 閔種默                                     光武 元年(1897년) 9월 28일

 

 

Konsulat des Deutschen Reiches für Korea

 

Söul, den 28. September 1897

 

Euer Excellenz beehre ich mich den Empfang des sehr gefälligen Schreibens vom 23ten d. Mts. womit Sie mich zu meiner grossen Befriedigung benachrichtigen, dass das Königlich Koreanische Unterrichtsministerium beschlossen hat, am 1ten Januar 1898 eine Deutsche Schule einzurichten, und mich ersuchen, eine geeignete Persönlichkeit als Lehrer an derselben auszusuchen, mit verbindlichsten Danke ganz ergebenst zu bestätigen.

Euer Exzellenz gestatte ich mir darauf ergebenst zu erwidern, dass ich nicht verfehlen werde, der Kaiserlichen Regierung diese wichtige und erfreudliche Nachricht vorzutragen und zuförderst bei den Deutschen Behörde in Japan und China anzufragen, ob sich in diesen Ländern eine passende Person zu Leitung der Schule, befindet.

Inzwischen darf ich Euer Excellenz ganz ergebenst bitten, mir die Bedingungen, unter denen Ihre hohe Regierung bereit ist, den Lehrer der Deutschen Sprache anzustellen, sehr gefälligst mittheilen zu wollen.

Ich benutze diese Gelegenheit Euer Excellenz die Versicherung meiner vorzüglichsten Hochachtung zu erneuern.

F. Krien  

An Seine Excellenz den Königlich Koreanischen Minister der Auswärtigen Angelenheiten

    Herrn Min

J. No. 421                                                Söul

 

이 크리인의 답서 중에는 청국과 일본에 적당한 인물이 있는지 알아보겠는데, 귀국 정부의 조건이 어떤지 알고자 한다고 조회해 왔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떤 대우인가를 묻고 있다.

1897년 10월 26일자로 크리인은 덕어교사 볼얀을 추천하고 있다.59)

 

1794 덕어교사 쁠지암이의 추천

    (발) 덕국영사 국린

    (수) 외부대신 민종묵                                  광무 원년(1897년) 10월 26일

 

 

 

Konsulat des Deutschen Reiches für Korea

 

Söul, den 26. Oktober 1897

 

Euer Excellenz beehre ich mich im Verfolg meines Schreibens vom 28ten v. Mts. betreffend die Eröffnung einer Deutschen Spachschule in Söul ganz ergebenst  benachrichten, dass ich Ihrem Ersuchen vom 23ten v. Mts. entsprechend in Japan und China Erkundigungen eingezogen und einen durchaus geeigneten Lehrer in Tokio gefunden habe. Es ist dies der Deutsche Reichsangehörige J. Bolljahn, der in Deutschland die Prüfung  Lehrer an Deutschen Mittelschulen bestanden hat und gegenwärtig in der höheren Mittelschule zu Tokio in der Deutschen Sprache und anderen Fächern Unterricht ertheilt.

Herr Bolljahn ist bereit, die Stelle als Lehrer an der in Aussicht genommenen Deutschen Schule anzunehmen, wen die Vertragsbedungungen ihn befriedigen. Auf der Deutschen Gesandtschaft zu Tokio wird ihm ein sehr günstiges Zeugnis ausgestellt. Denn er ist länger als sieben Jahren dort thätig gewesen und hat sich stets als einen tüchtigen Lehrer und ehrenwerthen Mann bewiesen. Er würde sich demnach als Lehrer an der hiesigen Sprachschule meiner Ansicht nach vorzüglich eignen.

Euer Excellenz darf ich deshalb ganz ergebenst bitten, mir den in Ihrem Schreiben vom 23ten v. Mts. versprochen Entwurf zu einem Engagements-Vertrage gefälligst bald zusenden zu wollen.   

Ich benutze diese Gelegenheit, Euer Excellenz die Versicherung meiner vorzüglichsten Hochachtung zu wiederholen.

F. Krien

 

An den Koreanischen Minister der Auswärtigen Angelegenheiten

        Herr Min

J. No. 455                   Excellenz                     Söul

 

이 문서에서 보듯이 J. Bolljahn을「뽈지암」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볼리얀」이 정확하다는 견해도 있으나,60) 흔히 사용하는「볼얀」으로 통일하기로 한다.

이 문서에 의하면, 덕국 영사 크리인이 일본과 청국에 조회한 결과, 동경에서 적당한 인물을 찾았다는 것. 그 사람은 독일 국적을 가진 볼얀이며 그는 독일에서 중학교 교사시험에 합격하였고, 현재는 동경의 고등학교에서 독일어와 기타 과목을 교수하고 있으며 또 동경에서 7년 이상 근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능하고 존경받을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받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볼얀은 한 마디로 독어교사로서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당시 우리 나라의 외국어교사들의 출신을 보면 다양하였다. 예컨대 영어학교의 T. E. Halifax가 전신기사였고, 법어학교의 E. Martel이 Paul Georg von Möllendorf 밑에서 上海 세관에서 근무하였고, 아어학교의 Birukoff가 예비역 포병대위였던 점을 고려해 볼 때 덕어학교의 교사는 보다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德原案에는 그밖에도 덕어교사와 관련된 문서들이 있으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다. 그 후 볼얀의 채용결정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덕어학교가 1898년 9월 24일에 개교한 것으로 보아 처리된 것으로 생각된다.   

덕원안 제2093호에는 덕어교사의 여행증 신청(1899. 7. 13), 그리고 제2643호에는 덕어학교 졸업생 가운데 우수자 추천이 그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발) 덕국 영사 瓦以壁

(수) 외부대신 임시서리 兪箕煥                                  광무 6년(1902년) 4월 8일

 

敬啓者 玆由德語學校 敎師指名之該校卒業生四人, 左開仰佈, 該四員皆堪任貴部飜譯官之職. 而秦秀爲最優秀云耳, 단此, 仍頌台安

四月 八日 瓦以璧 左開

秦秀, 柳晩, 崔東洙, 朴在純

 

이 문서는 외부에 대해 덕어번역관 임명을 요청한 후에(제2622호) 덕국 영사관에서 일방적으로 취한 조치로서 덕어학교 우등졸업생 4명을 추천하고 있다. 앞서 본 이광린의 외국어학교 일람표에 의하면 이 중 진수와 유면은 우등 졸업생이라고 생각된다.  

또 이 문서의 발신일이 1902년 4월 8일이니 개교한지 5년만에 4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셈이다. 또 1911년 11월 1일자로 폐교되기까지 전체 5명의 졸업생을 내었으니 1902년부터 1911년 사이에 졸업한 사람은 1명뿐이다. 이렇게 볼 때 1902년 이전까지는 볼얀 혼자서 교수하였고, 이 문서가 작성된 1902년에 덕어학교 졸업생 운운 한 사실로 보아서 1908년 5월에 덕어학교 1회 졸업생을 내었다는 이광린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된다.61)

이들 우등졸업생들은 칙령으로 우대를 받았으며,62) 외부의 번역관으로 추천되었으나 진수와 유면은 번역관에 임용되지 않고 모교의 교관이 된 것으로 보인다.

덕원안 제2876호는 덕어교사 볼얀에 대한 봉급인상을 그 내용으로 하며 원문은 다음과 같다.   

 

제2876호 덕어교사 볼리얀에 대한 봉급인상 건

       (발) 덕국변리공사 謝爾典

       (수) 외부대신     李道宰                              광무 7년 (1903년) 6월 13일

                                                                Söul, den 13. Juni 1903

 

 

Kaiserliche Deutsche Legation Soeul

J. No. 488

 

Herr Minister!

Nachdem der Lehrer an der von der Kaiserlich Koreanischen Regierung hier unterhaltenen Deutschen Sprachschule Herr J. Bolljahn nunmehr der Koreanischen Regierung eine Reihe von Jahren gute Dienste hat, glaube ich, dass es angezeigt erscheint, ihm eine Gehaltserhoehung zukommen zu lassen.

Ich möchte Eure Excellenz daher bitten, bei dem Herrn Minister des Oeffentlichen Unterrichts vorstellig zu werden, damit Herrn Bolljahn vom 1. Juli d. J. an eine Zulage gewaert werde, und zwar von 25 Yen monatlich im ersten Jahre, welche im 2ten Jahre auf 50 Yen monatlich, im 3ten auf 75 und nachher 4ten auf 100 Yen monatlich erhoert wuerde, sodass Herr Bolljahn dann d.h. im 4ten Jahre im Ganzen 400 Yen monatlich zu bekommen, und, sobald dieses Maximum erreicht, eine Erhoehung nicht mehr stattfinden haette.

Eine solche Regelung erscheint mir gerecht zu ein und ich bitte Sie die Angelegenheit in diesem Sinne dem Herrn Minister des Oeffentlichen Unterrichts zu unterbreiten.

Genehmigen Eure Excellenz die Versicherung meiner ausgezeichnetsten Hochachtung.

 

von Saldern

Seine Exzellenz dem Minister des Aeuszern

Herrn Yi To Chae.

 

같은 덕원안 제2880호의 내용은 봉급인상을 요구한 사실이 신문에 보도된 데 대한 다음과 같은 항의이다.

 

제2880호 덕어교사 종급인상요구사의 황성신문 게재에 대한 항의

      (발) 덕국 변리공사 謝以典

      (수) 외부대신      李道宰                               광무 7년(1903년) 6월 22일

                                                  

 Soeul, den 22. Juni 1903

 

Kaiserlich Deutsche Legation, Soeul

J. No. 502.

 

Eure Exzellenz!

Ich habe Ihr Schreiben vom 19. Juni bekommen, in welchem Sie mir mitteilen, dass Gehalt des Herrn Bolljahn nicht erhoert werden kann, weil es unmoeglich sei das Gehalt eines Lehrers allein zu erhoehen waehrend noch andere Lehrer vorhanden seien. Ich bitte dem Herrn Minister der Oeffentlichen Arbeiten die Sache noch einmal vorzulegen. Ich habe bevor ich Ihnen geschriebenen mit meinem Franzoesischen und meinem Britischen Kollegen gesprochen und ich weisz, dass, mein Franzoesischer Kollege auf fuer Herrn Martel jetzt eine gleiche Gehaltserhoehung beantragt hat und der Groszbritanische Minister hat gesagt, dass er derselben Absicht wie wir sei, dass aber der Englische Lehrer erst zu kurze Zeit in Koreanischen Diensten sei, um schon jetzt eine Gehaltserhoehung fuer ihn zu beantragen; wenn er laenger gedient habe, solle auch fuer ihn der gleiche Antrag gestellt werde.

Ich ersuche daher die Gehaltserhoehung fuer Herrn Boljahn noch einmal mit dem Antrag fuer Herrn Martel zugleich in Erwaegung zu ziehen.

Gleichzeitig muss ich bei Euerer Excellenz schwer beklagen. Das was ich Ihnen wegen Herrn Bolljahn geschrieben habe, hat gleich darauf in der Zeitung gestanden. Ich schicke Ihnen das Zeitungsblatt hiermit ein. Ich schreibe Ihnen nicht, damit die Zeitungen erfahren, dass ich Ihnen schreibe. Wenn Sie Ihre Vertreter in Berlin, London und St. Petersburg fragen werden, werden Sie auch erfahren, dass das was die Fremden Gesandten an die dortigen Auswaertigen Minister schreiben nicht in die Zeitungen kommt. Ich wuerde mich in Berlin beklagen müssen, wenn in einer mehr wichtigen Sache wie die der Gehaltserhoehung eines Lehrers ebenfalls die Zeitungen von dem Inhalt unseres Schriftwechsels erfahren.

Genehmigen Sie, Herr Minister, die Versicherung meiner vorzüglichsten Hochachtung.

 

von Saldern

 

Seiner Excellenz dem Minister des Aeuszern

Herrn Yi To Chae.

 

또한 제3024호에는 덕어교사 사택료의 증액에 관한 것이며,63) 제3031호는 이를 독촉하는 내용이다.64) 제3024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3024호 덕어교사 사택료의 증액요청

     (발) 덕국 변리공사 謝爾典

     (수) 외부대신      李夏榮                               광무 9년 (1905년) 6월 14일

 

Soul, den 14. Juni 1905

 

Kaiserlich Deutsch Minister-Residentur in Korea

J. No. 426

 

Die Lehrer, welche an den von der Kaiserlich Koreanischen Regierung unterhaltenen Schulen europäischer Sprachen angestellt sind, bezogen bisher sämtlich eine Wohnunggeld-Entschädigung von monatlich 30 Yen. Seit etwa 6 Monaten ist nun dieser Wohnunhsgeldzuschuss für Herrn Frampton, den ersten Lehrer der englischen Schule auf 50 Yen erhöht worden. Herr Frmpton ist ungefähr 3 Jahre in Koreanischen Diensten, während Herr Bolljahn der Deutschen Schule schon 7 Jahre hier vorsteht.

Es ist nicht einzusehen, weshalb der eine Lehrer mehr bekommen soll als der andere. Was dem einen recht, ist dem anderen billig. Da die Bemühungen des Herrn Bolljahn beim Minister des öffentlichen Unterrichts, dasselbe Geld wie Herr Frampton zu bekommen, bisher erfolglos geblieben sind, so bitte ich Euer Excellenz das Erforderliche zu veranlassen, damit der Deutsche Lehrer ebenfalls 50 Yen monatliches Wohnungsgeld erhält.

Für eine Antwort würde ich Euere Exzellenz dankbar sein. Genehmigen Euere Exzellenz die Versicherung meiner ausgezeichneten Hochachtung.

von Saldern

 

Seiner Exzellenz dem Minister der Auswärtigen Angelegenheiten

Herrn Yi Ha Yung

 

이러한 문서들은 독일 정부의 입장 내지는 볼얀 개인의 문제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정치적ㆍ외교적인 상황도 아울러 검토해야할 것이다.   

 

다음 기사에서 보듯이 외국어학교 교관의 대우는 재정적 곤란으로 그다지 좋지 못했던 것 같다.

 

● 敎官齊退   各 學校 敎官에 月俸을 七月 以來로 乃無支撥인바 其 裏由인즉 各 敎官에 月俸 等給이 變更되야 往日 六級이 八級되고 五級이 七級되야 每人 二級을 減定함으로 相持未決하야 至于今闕俸하얏더니 日昨 該部에셔 各 敎官을 齊會詢議之際에 該大臣 李完用氏 言內에 現今 財政이 困難所致로 有比減俸之擧하니 准此施行이 無妨이라한즉 諸人이 憤怒 曰 厥初에 詔勅으로 規定한 俸級을 檀行減定이 事所未知라 하고 一齊히 請免하얏다더라.65)

 

 

이처럼 볼얀(J. Bolljahn)의 이름은 한글로는 쁠쟌, 볼지암, 한자로는 佛耶安으로 표기한다. 그는 한국으로 오기 전에 이미 일본의 고등학교에서 9년 (또는 7년) 간 교사로서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66) 1898년 7월 23일에 내한한 그는 덕어학교의 설립 당시부터 교사로 참여하였으며 그에 관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 (敎師延期) 學部에서 德語敎師 馬太乙 培材學堂 敎師 亞扁薛羅 仁港 日語敎師 巖崎 氏等의 雇聘年限이 今月 一日에 滿하얏기로 外部에 照會하고 加 一年 合同을 更定하얏더라.67)

      

여기의 馬太乙은 에밀 마르텔(Emil Martel, 1874-1949)68)로서 法語敎師였으므로 오자가 틀림없다. 인천의 일어교사로서는 岩崎厚太郞과 岡倉由三郞 등이 있다.69)

또 독일 상인들은 덕어학교에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이 나타난다.

 

⊙ (德校敎官) 德語學校 敎官이 有闕하기로 學部에서 該校 學員中 優等生 四人을 試才 選任 한다더라.70)

 

○ 덕어학교 교사 볼지암씨가 동셔양 각국 디지를 가라치는대 일본 디지가 모호하야 분명치 못한 고로 금일 밤에 덕공사와 학부 관인을 하교로 청하고 일본 디지 보는 환등긔계를 운동하야 그 실디를 보게 한다더라.71)        

  

⊙ 敎官試取   昨日 學部에셔 德語學校 敎官을 試取하난대 該校 敎師 佛耶安氏와 學部大臣이 會 同試才하더라.72)

 

● 日函外部  日公使(林權助)가 外部에 公函하얏스되 德語敎師 佛耶安氏의 續合同一事을 與英語敎師로 同式 續聘하는게 恐合妥宜라 하얏더라.73)

 

● 各學開學  各 學校에셔 四日前븟터 開學하난대 德語敎師 佛耶安氏난 韓德 兩國 交際上에 德語가 無함으로 尤極發憤하야 學徒에게 書冊 等件을 頒給하고 一場演說하야 受業을 懇切히 勸勉한다더라.74)

 

● 德師續聘   學部에셔 外部에 照會하얏난대 德語學校 敎師 佛耶安 속聘事로 請議政府하와 奏蒙制可事로 現承政府指令하얏삽기 該合同 四件을 伴送하오니 由貴部 捺章後 轉致德公 관하야 幷與 該敎師로 署押케 하라 하얏더라.75)

 

● 佛氏歸國   現○ 駐韓德國 領事관 書記生 佛令巨馬與氏의 子(日女所生) 는 年 今 十六에 日語 法語 英語난 能解하나 德語는 全然 不解하는 故로 韓國 德語學校 敎師 佛耶安 氏의게 半年이나 受學하다가 韓美電氣會社의셔 視務하난듸 月級이 百餘元이라. 然而 實地 工夫하기 爲하야 請願하고 本國으로 發程하얏다더라.76)

 

● 德師視察  官立漢城外國語學校 敎師 德人 보리안氏가 本月 二拾七日에 京城에셔 發行하야 平壤에셔 雲山을 經하야 新義州 地方을 視察한다더라.77)

 

볼얀은 아마 1906년 4월에 개통된 경의선 철도를 이용하였을 것이다.78)

그는 한국의 교육제도에 관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79) 그밖에도 한국에 관한 몇 편의 글이 있다.80)

볼얀은 법어학교 교사인 마르뗄 가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내한 당시 30세 가량의 독신으로 재한 외국인들 사이에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1910년까지 공식적으로 교직에 몸담고 있었다고 한다. 한일합방 이후에도 계속 한국에 체류하다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강화조약을 체결하자 귀국했다고 한다.81) 그러나 그에 관한 기사나 보도는 발견되지 않는다.   

 

(2) 최초의 한국인 교관

홍순호에 의하면, 덕어학교는 「1901년  6월 제1회 졸업생 이근호, 최정우, 서병협이 졸업하여 모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었다」82)고 하는데 그는 아무런 근거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들은 인천 일어학교의 한국인 교관이었으며,83) 또 관보에 의하면 이 중 徐丙協은 전 부교관으로서 인천 일어학교의 부교관으로 임명되었다.84) 이렇게 볼 때 홍순호의 서술은 잘못된 것이다.

한편 볼얀 자신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새해(1899년)가 된 이후에 이런 저런 학생들 17명으로 구성된 둘째 학급을 구성했다. 이들은 나의 둘째 조교가 가르친다. 첫째 조교는 이미 몇 달 전부터 앓아 누웠기 때문이다.85)

 

  그의 보고에서는 조교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다.

 

(3) 秦 秀

 

진수에 관하여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그는 1906년 9월 3일자로 부교관에서 교관으로 발령을 받았다.86)

 

(4) 柳 면

 

유면 역시 진수와 마찬가지로 부교관에서 교관으로 승진하였다.87)

 

(5) 崔泰卿

 

최태경도 위의 두 사람과 같은 케이스이다.88)

 

(6) 梁在건

 

양재건은 1900년 현채와 함께 광문사를 조직하여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등을 발간하기도 하였으며, 국민교육회의 회원으로 연동교회의 신자였다.89) 1906년 9월 덕어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그런데 「전 교관」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다시 임명된 것이다.90) 1907년 안의 군수로 임명되었다.

 

● 牛校盛況  昨日에 西江 牛山學校長 梁在건氏가 該 校舍를 擴張하기 爲하야 校舍를 重修 告 竣한 故로 敎育에 熱心하는 學部協辦 閔衡植氏와 內部地方局長 兪星濬氏와 紳士 諸氏가 該校에 一 切 會同하야 敎育의 關한 演說을 次第 勸勉하얏난대 西江의 文明思想이 從此日新하깃다더라.91)

⊙ 法校敎官  德語學校 敎官  梁在건氏가 安義郡守로 轉任한 代에 正三品 金成喜氏가  判任 敎官으로 被任하얏다더라.92)

 

⊙ 安졸餞宴  法學講習所 總務 梁在건氏가 日間 安義郡으로 赴任前往할 터인대 該講習員들이 親睦의 情을 表하기 爲하야 昨日 下午 七時에 餞別宴을 設하얏다더라.93)

 

여기의 법학강습소는 1906년 5월 국민교육회 안에 야학으로 설립된 것이다.94) 또한 양재건은 연동교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사찰위원 31인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95)

 

(7) 金成喜

 

교관 김성희의 호는 松堂이며, 1895년 9월 洪州府 주사를 지내고 1896년 10월부터 1898년 10월까지 경북 관찰부 주사를 지냈다. 1902년부터 1903년 5월까지 中樞院 議官을 역임하고 1907년 1월 한성덕어학교 부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덕어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쳤는지 다른 과목을 담당하였는지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1907년 5월에는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한자강회 및 대한협회 회원으로서 사회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저술한 책자는 발견되지 않으며, 여러 편의 논설이 있다.96) 논설은 대부분 한문으로 작성된 것으로 볼 때 한학을 전문으로 공부한 사람 같다. 그런 때문인지 독일의 문물에 관하여는 직접 언급한 것은 물론 없고 간접적으로 소개한 흔적도 보이지 아니한다.

 

(8) 李仁植

 

이인식은 부교관으로 임명되었다.97) 내부 번역관보를 역임한 사람이 아니가 생각된다.  

 

 

(9) 기 타

 

⊙ 德語敎官奔競  學部에셔 德語學校 敎官一소를 敍任할터인대 各其 親切의 食口를 區處 하랴 하야 自然 奔競이 大殷한 故로 該校 設施한지 十餘年來에 實施치 아니하고 卒業式을 行하야 一班 優等生에게만 卒業狀을 주엇난대 己往 卒業狀을 領受치 못한 人과 四年 卒業 期限이 經過한 學徒가 一體로 卒業狀을 請하야 議論이 紛紛한대 該 理由인 則 都是敎 官一소敍任할 事로 奔競하난 中에셔 生한 事이라 하니 下回를 姑侯하야 다시 揭載하갯노라.98)

 

한편 관립학교 직원의 사립학교 출강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에서 보듯이 제한을 규정하고 있다.

 

● 學訓各校長  學部에셔 各 官立學校長에게 訓令하되 各 官立學校 職員이 他 私立學校 敎 師나 或은 講師 囑托을 欲受하난 者난 左開 事項을 先具하야 所屬 學校長의 許可를 受할 事라 하얏난대 一 囑托學校의 名稱과 種類 及 所在地, 一 擔任學科와 一 一週間 敎授日數 及 時間, 一 執務時間 (自何時至何時) 一 一個月 報酬金 或은 手當金 幾何와 從來 他 私立學校 敎師나 或은 講師된 者도 前項 定規를 一체 履行할 事요 學校長은 其 所屬 職員에게 私立學校 敎師나 或은 講師될 事를 許可할 時에난 三日 以內에 學部大臣에게 報告할 事이라더라.99)

 

또한 관리의 겸직을 금지하고 있다.

 

● 公私明分  各 府部院廳 官吏 中에 如有托名會社와 兼행 他 事務者어든 隨卽 本職을 解任 하야 公私執務에 免致相妨케 하라난 政府照會에 對하야 法部에셔 平漢 兩裁와 法官養成所에訓○하되 官員服務紀律 第七條 第十條를 不得不 實施乃己인바 貴院 所官員 中 會社事務와他 事務를 兼行하난 者有하거던 該員의 本職 姓名을 一一 ○錄馳報하라 하얏더라.100)

 

덕어학교 교관의 완전한 명단이나 자세한 인적에 관해서는 더 연구할 것이 많이 있다.

 

 

6. 학교운영

 

기록에 나타난 학교운영에 관한 모습을 간단히 살펴본다.

 

(1) 토론회

 

덕어학교에서 토론회를 개최한 보도는 다음과 같다.

● 起送審査   德語學校에셔 討論會事件으로 該 敎官 及 學徒 申興雨 氏等이 平理院에 被囚 됨은 本報에 己記하얏거니와 日昨에난 日語學徒로 其 土論時에 往參하얏던 尹時鎬 氏를 審査次 押囚하얏다더니 平理院에셔 學部에 照會하되 申興雨 等의 案件을 方行審査하난듸 審問할 事가 有하니 該校 學徒 李鍾善 金容○ 崔東壽 等 指拒起送하라 하얏더라.101)

 

(2) 체육대회

 

영어학교의 체육대회는 1897년 6월 16일에 실시되었는데 이에 관하여는 한국평론 등에서 보도하고 있다.102) 또한 외국어학교에서는 운동회를 열기도 하였으며,103) 덕어학교 자체에서도 운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 宮大捐助德校   再昨日에 德語學校에셔 東門外 奉國寺에 運動會를 開하고 各科 運動할 際에 宮內府 大臣 李載克氏가 適其時過去하다가 學員에게 一場 勸勉하고 金 五환을 運動費로 捐付하얏다더라.104)

 

또한 광무 2년 4월 29일에는 외국어학도 대운동회가 전 훈련원에서 개최되었는데 당시의 상황을 황성신문은 두 면에 걸쳐 아주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105)

 

이와 관련하여 신체검사를 실시한 기사도 발견된다.

 

● 身體檢査   昨日 學部에셔 官立 각 학校長을 會集하야 各 學徒에 身體檢査을 會議하난대 將次 醫師를 各 학校로 派送하야 檢査한다더라.106)

 

그 밖에 학생들의 출석 상태도 좋지 않았던 모양 같다.

 

● 退學宜査   外國語學校長 鄭喬氏가 各 學校로 公송函하기를 挽近解馳하야 學徒로 出此入彼가 比比有之하니 ○不慨然이리오. 退學한 學徒의 居q住父名을 조錄函布하니 各 學徒試取時 査得退出하야 以杜轉學之弊케 하리라 하얏더라.107)

 

이와 같이 퇴학한 학생들의 신상까지 파악하여 함부로 전학하지 못하게 하였다.

 

(3) 졸업식

 

다음 기사에사 보듯이 덕어학교는 1907년에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 德語學校卒業式  立 漢城德語學校에셔 再昨日에 第一回 卒業禮式을 設하고 李仁植氏等 四人의게 卒業狀을 授與하얏난대 學部 學務課長과 參與官이 來參하얏다더라.108)

 

이와는 달리 홍순호는 1901년 6월에 제1회 졸업생을 내었다고 한다.109)

 

외국어학교 제2회 졸업식 광경이 황성신문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고 있다.

 

● 外國語學校卒業生   官立 漢城外國語學校에셔 第二回 卒業禮式을 昨日 擧行하얏난대 卒業生氏名이 如左하니

(日語部) 金均祚 兪鎭昌 崔在宛鳥 李泰基 金東衡 朴鳳顯 高台錫 芮永洙 李璋漢 池昌逸 高羲彬 高宇相 鄭泰亨 金章煥 李東善 崔鎬三 金敎承 高羲驩 李東鎭 李魯洙 李大爀 宋甲洙 洪斗杓 鄭學默 崔 崙  存泰基 崔鳳基 朴宗星 金左銘 高羲鳳 安益善 李鴻○ 蔡駿錫 金益濟 梁璟煥

(英語部) 李源赫 李俊옥 申珽均 李範寧 崔明澈 高永日 崔相浩 朴泰鎭 南相穆 南相協 任弼宰 李起鳳 南宮建 李元淳 咸秉晳 高炳星 金宜永 金駿善 沈薰澤  

(漢語部) 權泰翊  李起馨 王熙林 安聖護 睦源鳳 鄭求東 趙元成 韓孝錫 李定凡

(法語部) 姜漢中 金英權 李容煥 金錫培

(德語部) 金成求 李膺在

(日語部) 速成科) 尹弘燮 柳寅卨 李丙熙 吳明煥 李學性 崔敏洙 洪○悳 朴英秀 李鍾復 尹正燮 李采然 柳承熙 尹應求 崔昌煥 徐炳雲 朴景烈 成孝國 羅錫基 申聖雨 陳瓚 李白應 具章會 尹柱伯 尹喆炳 高應漢 鄭泰稷 田慶雲 李海雲 李丙珪 趙羲大 李圭寅 鄭仁澤 陸丙宇 金容德 金基永 金熙燦 金完洙 氏等 一百六人이더라.110)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전체 졸업생 106인 중 덕어부 졸업생은 불과 두 사람뿐이다. 그런데 관보 제4380호에 의하면, 일어부 35명, 영어부 19명, 한어부 9명, 법어부 4명, 덕어부 2명으로 합계 69명으로 위의 기사와는 달리 보도되고 있다. 그 다음 해인 1908년에는 외국어학교 졸업생 전체는 71인이었으며,111)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그밖에도 덕어학교 졸업생으로 구한말의 법률가이며 사회주의자로서 유명한 許憲이 1903년 덕어학교에서 공부했다는 견해112)도 있고, 申興雨(1883-1959)가 학생회장을 지냈다는 서술113) 등도 보인다.

 

 

7. 결 론

 

이상으로 당시의 공식문서와 각종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통하여 덕어학교의 운영실태와 현황 등을 검토하여 보았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덕어학교는 구 한말의 관립 외국어학교 중 가장 늦게 설립되었으며 입학지원자의 수도 일어학교나 영어학교에 비해서 훨씬 적고 인기도 별로 없었다.

둘째, 덕어학교의 수업 년한과 교과목에 대해서 검토할 때 일어와 중국어에 비해서 길고 또한 교과목도 다른 어학교와 마찬가지로 체계화되지 못하였다.

셋째, 교수진은 독일인 볼얀을 중심으로 약간의 한국인이 참여하였다. 볼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혼란한 국내외 정치상황으로 내실 있는 수업이 불가능하였다.

넷째, 볼얀을 비롯하여 당시의 독일 외교관들에 관한 독일측의 문헌을 활용하여 정치사적 외교사적인 연구가 진척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덕어학교 뿐만 아니라 개별 외국어학교에 대한 연구와 어학 일반에 대한 연구도 요망된다. 이것은 단지 구한말 당시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분석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공할 것이다.  

(2000. 11. 30)

 

 

각주

* 동아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법학박사.

1) 독일의 문물은 최종고, 한독교섭사, 홍성사, 1983; 이유영·김학동·이재선 공저, 한독문학비교연구 I -- 1920년대까지 독일문학의 영향을 중심으로 -- , 삼영사, 1976; 홍순호, 대한제국시대의 한독관계,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편, 대한제국사연구, 백산서원, 1999, 51-86면 등 참조.   

2) 이에 관한 문헌은 별로 없다. 예컨대 김정진, 한국 독일어교육의 비평사적 고찰, 독일문학(한국독어독문학회) 제11집 1971, 3-55면 참조.

3) 상세한 것은 稻葉繼雄, 舊韓末「日語學校」の硏究, 九州大學出版會, 1997; 同人, 官立漢城外國語學校について -- 日語學校を中心に -- , 韓 通卷 제103호, 1986, 133-182면 참조.

4) 김윤희, 구한말의 영어교육, 한국외국어대 석사논문, 1986 및 김영우, 구한말 외국어교육에 관한 연구(I), 공주사범대학 논문집 제16집, 1978 참조.

5) 상세한 것은 이광린, 구한말의 관립외국어학교, 개정판 한국개화사연구, 일조각, 1985, 134면 이하.

6) 京師 동문관은 중국 청조 말기인 1862년(同治 1년)북경에 설립된 최초의 관립 외국어학교이다. 우리 나라 구한말의 육영공원과 관립외국어학교의 모델이 되었다. 상해와 광동의 분관에 대해서 북경은 경사 동문관이라고 불렀다. 설립 동기는 청조가 천진조약과 북경조약 이후의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처하는 한편, 특히 외국어 습득자의 필요를 통감하였기 때문이다. 영문관, 법문관, 아문관, 산학관, 덕문관, 동문관(일본어)등이 추가되었다.

동문관에서는 휘튼, 울시, 블룬츨리의 국제법 책 외에, 마르텐스의 외교지침, 나폴레옹 법전, 싱  가폴 형법 등을 번역하였으며, 이곳의 교육은 유럽인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예컨대 Ed. Rolin, Le Tungwen-College. Enseignement du Droit International en Chine, dans: Revue de Droit International et de Législation Comparée, tome XXI(1889), p. 108-110 등.

오랫동안 동문관 총교습을 지낸 마틴의 동문관 회상은 A Cycle of Cathay or China, 1896,

Chapt. VI. VII. The Tungwen College(pp. 293-327) 참조.

상세한 문헌은 孫子和, 淸代同文館之硏究, 嘉新水泥公司, 1977; 杜祖胎, 京師大學堂的成立經過   與早期發展, 東方雜誌復刊 第12卷 9號(1969);李兆桑,北京同文館硏究,香港大學中文系論文,1966;   吉田寅, 英華學堂Anglo-Chinese Collegeの一考察 - 中國新敎傳道開拓期における學校敎育 -, し  ろがね 第2號(1962); 胡適, 京師大學堂開辯的日期, 民主潮 第11卷 1號(1961); 郭吾眞, 略論北  京同文館的設置, 山西師範學院學報, 1957.

Knight Biggerstaff, The Earliest Modern Government School in China, Ithaca, NY: Cornell Univ.   Press, 1961; M.C. Wright, The Last Stand of Chinese Conservatism,1957.アジア 歷史事典, 平凡社,  1961, 84-85면 참조.

7) 황성신문 1908년 3월 22일자.

8) 독립신문 1898년 7월 8일자.

9) 뎨국신문 1902년 11월 15일자.

10) 대한매일신보 1906년 6월 29일자.

11) 대한매일신보 1906년 7월 5일자.

12) 대한매일신보 1906년 7월11일자.

13)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4일자(一曲峨峨洋칼럼).

14) 李圭泰, 別技軍 이야기, 조선일보 1999년 3월 26일자

15) 대한매일신보 1906년 1월 7일자.

16) 황성신문 1906년 10월 19일자.

17) 칙령 제40호 제1조 및 황성신문 1906년 9월 9일자.

18) 간단한 것은 김효전, 서양 헌법이론의 초기수용, 1996, 240면 이하 참조.

19) 대한매일신보 1909년 5월 20일자.

20) 황성신문 1898년 9월 17일자.

21) 고영희는 본관이 제주이며, 1881년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이듬해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가 올 때 差備譯官이 되었다. 參義교섭통상사무, 참의내무부사, 농상공부협판, 학부협판, 주일 특명전권공사 등을 거쳐 1896년 농상공부대신 서리가 되고, 독립협회가 발기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 1898년 탁지대신이 되었다. 1907년 伊藤博文이 헤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의 양위를 강요할 때 이에 반대한 일도 있었으나 한일합방에 찬성한 친일파로서 합방후 일본의 자작을 수여받았다. 한국인명사전, 신구문화사, 1989, 29면.

22) 동문학교는 15세 이상의 총명한 자제를 선발하여 영문과 영어를 가르쳤는데, 이 일은 갑신년 한성순보 제15호(1886. 2. 22)에 이미 보도한 바 있다.

  「해마다 6월과 12월에 藝를 시험보여 뛰어난 사람을 뽑아 정진하기를 권장한다. 그 가운데 우등인 학도로 南宮 檍ㆍ申洛均ㆍ權鍾麟ㆍ洪禹觀ㆍ成翊永ㆍ金奎熙는 이미 官에 임용되었는데, 商務의 교제에 있어 많은 유익이 있으리라 한다」.

23) 볼얀의 사진은 서울대학교 독일학연구소편, 독일 이야기 (2), 거름, 2000, 354면에 게재.

24) J. Bolljahn, Das Koreanische Schulwesen, Deutsche Zeitschrift für ausländisches Unterrichtswesen,    Jg. 5. 1900, 3. 홍순호역, 볼얀이 본 한국의 교육제도,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편, 20세기 전반기   한국사회의 연구, 백산자료원, 1999, 275-276면 참조.

25) 대한매일신보 1909년 3월 2일자.

26) 황성신문 1909년 7월 31일자.

27) 황성신문 1906년 12월 24일자.

28?? 황성신문 1906년 12월 28일자.

29) 대한매일신보 1907년 1월 5일자.

30)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13일자.

31)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27일자.

32) 황성신문 1907년 5월 10일자.

33) 황성신문 1908년 11월 12일자.

34)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18일자.

35) 대한매일신보 1908년 12월 19일자.

36) The Second Annual Report on Reforms and Progress in Korea, 1909, p. 160과 161 사이 참조. 이 책자는 고의로 한국의 실정을 비하하고 일본의 치적을 과장 서술하여 당시의 대한매일신보로부터도 비난을 받은 바 있다.

37) 황성신문 1900년 3월 16일자.

38) 황성신문 1900년 5월 3일자.

39) 황성신문 1900년 6월 21일자.

40) 황성신문 1900년 6월 28일자.

41) 황성신문 1900년 7월 7일자.

42) 황성신문 1901년 12월 17일자.

43) 황성신문 1902년 2월 6일자.

44) 황성신문 1902년 6월 23일자.

45) 황성신문 1902년 6월 25일자.

46) 황성신문 1905년 4월 21일자.

47) R. Wunsch, Arzt in Ostasien, Gerturd Claussen-Wunsch(Hrsg.), Krämer 1976. 金玉慶·金鍾大 共譯, 高宗의 獨逸侍醫 분쉬博士, 螢雪出版社, 1982. 이 책은 김종대 옮김,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 학고재, 1999 새 번역이 출간되었다.

   국내에서는 분쉬 의학상이 제정되어 있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48) 황성신문 1907년 2월 7일자.

49) 李光麟, (주 2), 참조.

50) 德原案 2권 356면 (제2643호) 및 후술 참조.

51) 황성신문 1908년 4월 3일자.

52) 황성신문 1906년 6월 21일자.

53) 황성신문 1906년 9월 8일자.

54) 겸임 관립 한성일어학교장 법어학교장 사범학교장 학부 편집국장 신해영. 관보 제3553호 1906년 9월 8일자 및 황성신문 1906년 9월 9일자.

55) 稻葉繼雄, 舊韓國の敎育と日本人, 九州大學出版會, 1999, 213면.

56) 정영희, 개화기 종교계의 교육운동 연구, 혜안 1999 참조.

57) 볼얀, 홍순호역, 앞의 글, 277면.

58) 대한매일신보 1906년 3월 1일자.

59) 德原案 1, 문서번호 1794호, 709면.

60) 김정진, 한국 독일어교육사(주 2), 41면.

61) 김정진, 앞의 글, 43면.

62) 관보 제1716호 광무 4년 10월 27일자 칙령 참조.

63) 덕원안 2권 603면 (제3024호).

64) 덕원안 2권 608면 (제3031호).

65) 대한매일신보 1905년 9월 30일자.

66) 명치 초기 일본에 온 고빙외국인에 관하여는 Ardath W. Burks ed., The Modernizers: Overseas Students, Foreign Employees, and Meiji Japan (Boulder, Colo.: Westview Press, 1985); Hazel J. Jones, Live Machines: Hired Foreigners and Meiji Japan(Vancouver: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Press, 1980); Noboru Umetani, The Role of Foreign Employees in the Meiji Era in Japan, Tokyo: Institute of Developing Economies, 1971; Edward R. Beauchamp, An American Teacher in Early Meiji Japan, Honolulu: University Press of Hawaii, 1976; Edward R. Beauchamp and Akira Iriye eds., Foreign Employees in Nineteenth-century Japan, Boulder: Westview Press, 1990; Neil Pedlar, The Imported Pioneers: Westerners to helped Build Modern Japan, New York: St. Matin's Press, 1990; Pat Barr, The Deer Cry Pavilion: A Story of Westerners in Japan 1868-1905, New York: Harcourt, Brace & World, 1969 ; Kurt Meißer, Deutsche in Japan, Stuttgart 1940 등 참조.

   일본 문헌은 梅箔昇, お雇い外國人の政治·法制, 1974; 今井壓次, お雇い外國人, 麗島出版會, 1975 등 참조.

67) 황성신문 1900년 5월 3일자.

68) 상세한 것은 김효전, 서양 헌법이론의 초기수용, 1996, 325면 이하 참조.

69) 이들에 관하여는 稻葉繼雄, 앞의 책, 250-262면 참조.

70) 황성신문 1900년 5월 31일자.

71) 뎨국신문 1900년 11월 30일자.

72) 황성신문 1904년 3월 31일자.

73) 대한매일신보 1905년 8월 19일자.

74) 대한매일신보 1905년 9월 5일자.

75) 대한매일신보 1905년 10월 22일자.

76) 대한매일신보 1906년 9월 1일자.

77) 황성신문 1909년 3월 21일자.

78) 경의선 개통식에 관한 보도는 대한매일신보 1906년 4월 3일자 참조.

79) J. Bolljahn, Das koreanische Schulwesen, in : Deutsche Zeitschrift für ausländisches Unterrichtswesen, Jg. 5. 1900, 3. S.193-209. 이 글의 원문과 김성은의 번역은 韓國의 敎育制度,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대한제국연구(Ⅲ), 1985. 100-131면 참조. 또한 홍순호역, 볼얀이 본 한국의 교육제도,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편, 20세기 전반기 한국사회의 연구, 백산자료원, 1999, 267-286면에도 수록되었다.  

80) 예컨대 Korea, Land und Leute. in: Zeitschrift für Missionskunde und Religionswissenschaft, Jg. 14, 1899, S. 353-360; Das Schulwesen in Korea, in: Zeitschrift für Philosophie und Pädagogik, 1899, S. 125-127; Das koreanische Schulwesen, in: Deutsche Zeitschrift für ausländisches Unterrichtswesen, 5, 1900, S. 193-209; Koreanische Sitten und Bräuche, in: Zeitschrift für Missionskunde und Religionswissenschaft, Jg. 15, 1900, S. 65-77;  Anfänge der protestantischen Mission in Korea und ihr gegenwärtiger Stand, in: Zeitschrift für Missionskunde und Religionswissenschaft, Jg. 15, 1900, S. 257-264; Korea, in: Zeitschrift für Missionskunde und Religionswissenschaft, Jg. 20, 1905, S. 205-207 등이 있다.

81) 홍순호, 대한제국시대의 한독관계,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편, 대한제국사연구, 백산자료원, 1999, 67면.

82) 홍순호, 대한제국시대의 한독관계(주 81), 67면. 이들의 한자명은 李根浩, 崔鼎夏, 徐丙協이며, 최정우가 아니라 최정하이다.

83) 이광린, 구한말의 관립 외국어학교(주 5), 137면 참조.

84) 황성신문 1906년 9월 6일자.

85) 볼얀, 홍순호역, 279면

86) 관보 제3549호 광무 10년(1906)년 9월 3일자. 황성신문 1906년 9월 6일자.

87) 관보 제3549호 1906년 9월 3일자 및 황성신문 1906년 9월 6일자.

88) 관보 제3549호 1906년 9월 3일자 및 황성신문 1906년 9월 6일자.

89) 국민교육회에 관하여는 최기영, 국민교육회의 설립과 기독교, 동인, 한국근대계몽운동연구, 일조각, 1997, 197-226면 참조.

90) 황성신문 1906년 9월 6일자.

91) 황성신문 1906년 11월 19일자.

92) 황성신문 1907년 1월 9일자.

93) 황성신문 1907년 1월 10일자.

94) 김효전, 한국개화기의 법학교육, 한림정수봉박사화갑기념논총, 1988, 492면 참조.

95) 조창용, 백농실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3 및 최기영, 위의 책, 207면 각주 41 참조.

96) 예컨대 殖産部槪說(1906), 獨立說(대한자강회월보 제7호, 1900, 15-17면), 敎育의 宗旨와 政治의 關係(동 제11호, 21-24면), 松堂主人, 政府의 職分(동 제11호, 38-41면), 國家意義(동 제11호, 41-43면 및 제13호 8-42면?), 民族國家說(夜雷 제2호, 1907), 地方自治制度槪論(夜雷 제4호, 1907, 10-13면; 제5호 4-6면; 제6호 5-6면), 政黨의 事業은 國民의 責任, 대한협회회보 제1호, 1908, 26-32면; 제2호 20-25면), 政黨의 責任(동 3호, 21-24면), 國民的內治 國民的外交(동 제4호, 24-29면), 政黨與黨相互監督論(동 제9호, 1-4면), 敬告國民(政治觀念)(동 제11호, 7-8면), 眞政黨與非政黨論(동 제12호, 1-3면) 등이며, 번역으로는 監督機關說(대한협회회보 제4호 및 제6호), 理財說(1907) 등이 있다.

97) 관보 제3700호 1907년 2월 27일자.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8일자.

98) 황성신문 1907년 2월 1일자.

99) 황성신문 1906년 11월 26일자.

100) 황성신문 1907년 1월 10일자.

101) 황성신문 5권 778면.

102) The Korean Repository, Vol. IV (Jan.-Dec. 1897). The Trilingual Press, Seoul 1897, pp. 235-237.

103) 황성신문 1907년 6월 5일자.

104) 황성신문 1907년 6월 5일자.

105) 황성신문 광무 2년 5월 1일자.

106)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4일자.

107) 대한매일신보 1906년 7월 13일자.

108) 황성신문 1907년 2월 7일자.

109) 홍순호, 앞의 글, 67면.

110)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4일자.

111) 황성신문 1908년 3월 28일자.

112) 심지연, 허헌 -- 하나의 조국 염원한 좌파 민족주의자 -- , 동아일보사, 1995, 11면. 심지연은 「독일계 학교인 덕어학당」 운운 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113) 이광린, 한국 개화사의 제문제, 2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