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섬의 역사

-장 칼뱅(Jean Calvin)의 인물연구-

 

                                                      

                                                      이  영  수*

 

                          

 

1. 들어가기

 

  민주주의의 자유가 자신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세기말에 즈음하여 우리자신의 좌표설정을 위한 독재자의 초상화를 장 칼뱅(Jean Calvin)이 끼친 해악과 유익을 그 삶의 양태 속에서 공과(功過)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인간의 본성 중에 혼자 고립되지 않고 공동체 속에 스스로 합일하고자 하는 신비한 욕구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공평하게 평화와 질서를 선물해 줄 수 있는 어떤 사회적, 민족적, 종교적 체제가 있을 것이라는 망상은 언제나 있어왔다. 실제로 인간을 지치게 만드는 수많은 문제들에 직면하여 고뇌하지 않아도 좋을 보편 타당한 질서를 얻어 세계가 기계화되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존재의 실존적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메시아적 동경이 종교적 예언자들의 나아갈 길을 닦아주는 요소이다. 한 시대의 이상이 그 힘과 색채를 잃어버리면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그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이상을 찾아냈다고 선언하면 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수백만의 사람들이 마법에 걸린 것처럼 스스로를 희생하고 심지어는 파괴할 각오까지 하게된다. 그리고 새로운 이념을 약속하는 예언자가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그에게 빠져든다. 어제까지의 자유와 편안함도 기꺼이 던져버리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그의 인도를 받아들인다. 타는 듯한 연대감에 도취되어 민족들이 자발적으로 노예상태에 빠져들고 자신을 내려치는 채찍을 찬양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되는 데 중요한 것은 그의 가치관이요 이념이다.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사상이라 한다. 인간정신의 지겹고 기계화된 세계에서 있을 것 같지 않은 새로운 모험을 성취하는 것은 이념의 힘이다. 주변사람들은 세상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람에게 경탄하고 쉽게 찬양하려든다. 그러나 이런 이상주의자들은 자신의 승리를 확인 한 후에 언제나 가장 악질적인 배신자가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지금까지 지구상에 단 하나의 종교, 단 하나의 철학, 단 하나의 세계관이 독재적으로 군림하여 정착한 일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생명적 다양성을 단 하나의 분모로 통합하려는 노력은 얼마나 진부하며 헛된 일인가.

  그러나 그 전부를 원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이다. 그는 제네바에서 단 하나의 의지, 자신의 의지만이 타당하고 전부가 되길 바랬다. 16세기초 종교개혁이 새로운 이념을 담아 새로운 결론을 만들었다. 루터를 종교개혁의 중심인물이라 한다면 발전 단계에 등장한 주인공으로 쯔빙글리(U.Zwingli), 존 녹스(John Knox) 그리고 장 칼뱅(Jean Calvin)이 그들이다.

  쯔빙글리는 새로운 종교적 이념의 실천자요, 존 녹스가 그 보급의 사도였다면 장 칼뱅은 새로운 종교의 입법자였다. 이 글은 장 칼뱅이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행한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역할의 서술이다. 그는 한번도 역사의 전면에서 정치권의 지도자로 등장한 일이 없는 종교지도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천재적 종교개혁자로서 정치의 실세였다. 그가 개인적으로 잔인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지성과 신념에 의해 잔인한 사람으로 바뀌어 갔다함이 적절할 것이다. 종교개혁의 시대에 진부한 과거의 파라다임으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없어 그는 강력한 지도이념을 조립해냈다. 혼탁한 시대, 불신의 시대, 사회의 기강이 혼미한 어수선한 시대인 20세기의 말에 우리는 우리사회의 공동체 건설을 위해 그리고 그 사회의 안정적 지속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졸고는 우리시대의 해이해진 기강을 진작시켜보려는 것이다. 칼뱅은 스스로 자본주의를 그려본 일도 없고 자본주의를 알지도 못했다. 그의 신정정치의 기본강령을 마련한 결과가 후일 자본주의 시대에 건전한 자본의 흐름을 규제하는 정신적 기초가 되었고 한편으로 따뜻한 감각의 생명현상에 찬물을 끼얹는 문화말살의 선도자이자 강력한 압제통치의 본보기가 되기도 하였다.

 

2. 칼뱅의 초상

 

  피에르 보에리오(Pierre Wœiriot)가 그린 칼뱅의 초상화를 보면 깡마르고 길다란 타원형의 얼굴에는 선의도 위안도 보이지 않는다. 좁고 깎아지를 듯한 이마 그 아래로 밤샘을 한 듯한 게슴츠레한 두 눈이 촛불처럼 이글거린다. 칼날같이 뾰죽한 매부리코는 움푹 꺼진 두 뺨 사이에 산맥같이 솟아 있다. 메마른 잿빛 피부에 따뜻한 살색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다. 핏기 없는 뺨에는 주름살이 지고 얼핏 보면 창백하여 병든 사람 같다. 길게 흩날리는 예언자 수염은 남자다운 힘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생기나 풍만함은 전혀 없는 냉혹한 보수주의자 같아 보인다.

  칼뱅은 자신의 정열에 스스로 불타버린 그런 모습이다. 너무 지치고 긴장된 모습이 오히려 보는 이가 안타까울 정도이다.

  칼뱅은 1509년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의 대성당이 자리잡은 도시 느와용(Noyon)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사교관구의 공증인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꼼꼼한 성격이어서 무슨 일이나 완벽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사제를 지망하여 파리로 가서 신학과 스콜라 철학을 공부했다. 그의 성격에는 스콜라 철학 공부가 더 맞았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는 그 아들이 수입이 좋은 직업을 얻어 편하게 살기를 바랬다. 수학도중 그는 부친의 명령으로 오를레앙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법률을 공부해야했기 때문이다. 그가 오를레앙에서 교육을 받을 때 몇몇 인문주의자의 세속적인 쾌락을 찬양하던 당시의 인문주의 사상에 물들지 않았다. 그리스 철학 정신이 바로 스토아의 영향이었다. 몸의 단련을 찬양하고 쾌락과 고통에 흔들리지 말아야 된다는 가르침을 본받은 것이다.

칼뱅은 청년시절부터 검은 옷만 입었다. 검은색은 진지함을 들어내는 죽음의 색깔이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서 의무복장을 하고 사람 앞에 나서서 외경을 불러일으키려고 했을 뿐 인간이나 형제로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가혹했듯이 자기 자신에게도 가혹하고 엄격했다. 그는 모든 감각적인 것을 포기하거나 억압하고 광신적 주지주의자로서 오로지 성경의 말씀으로만 살았다. 일생동안 자신의 육체를 엄격한 계율아래 가두어 두었고 생명의 유지를 위해 최소한의 식사와 최소한의 휴식만을 허용하였다. 그는 단 한번도 산책을 하거나 놀거나 기쁨을 맛보거나 긴장을 푼 적이 없으며 단 한번도 진짜 쾌락을 추구해 본 적이 없었다. 칼뱅은 정신적 신념에 광적으로 헌신하면서 생각하고 글쓰고 일하고 투쟁했을 뿐이다. 그는 스스로의 삶을 단 한시간도 살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육신을 그렇게 가두어 두고 금욕만으로 살수는 없다. 피는 더욱 거칠게 솟구치고 심장은 뜨겁게 방망이질 치길 원했다. 근육은 움직임을 부추기고 정액은 방출되고 싶어한다. 육체는 자기를 가둔 주인 칼뱅에게 무섭게 복수를 했다. 그는 편두통, 위통, 치질, 감기, 신경발작, 각혈, 담석증, 부스럼, 류마티즘, 방광염등으로 언제나 고생했다. 마치 신체의 각 기관들이 존재하지 않은 듯 무시하고 행동한 주인에게 몸의 각 기관은 여지없이 복수하여 그들의 존재를 확인시켜주었다.

 

  이처럼 무미건조한 인물 칼뱅은 술이나 여자를 통해 기쁨을 찾거나 누리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개종시킨 재세례파 교인의 미망인과 결혼을 했다. 그것도 성서의 말씀대로 살기 위한 그의 실천이었다. 그는 행복해지거나 남을 행복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 창백한 사나이 칼뱅. 그의 차디찬 감각에서 나온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마저 몇 일만에 죽고 말았다. 곧이어 아내가 죽고 홀아비가 된 서른 여섯 살 된 이 남자는 더 이상 결혼도 하지 아니했고 여자도 멀리했다. 금욕하고 말씀을 실천하고 계율을 강요하며 지독한 신정정치를 펼쳐나갔다. 그는 가혹한 사람이었다.

 

3.「기독교 강요」

 

  칼뱅이 프랑스 느와용에서 관세징수관겸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나 에라스무스와 로욜라가 다녔던 몽테퀴 학교에서 매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처음에는 성직자로 나중에는 법률가로 훈련을 받은 그는 24살 때 루터파를 만들었다. 그 때문에 그는 프랑스에서 쫓겨나 스위스 바젤로 도망쳤다. 그는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1535년에 발표했다. 이 글은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을 변호하는 글이요. 종교개혁의 방향을 설정하고 추진하는 교재가 되기도 했다. 루터가 영감을 받아 종교개혁을 시작하였다면 칼뱅은 이 글을 통해 종교의 조직자로서 등장한 것이다. 종교개혁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것을 막은 인물이 된 것이다. 이 작품은 루터의 성서 번역 이후로 종교개혁파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 되었고, 책이 출판되자마자 그 논리적인 정확성과 탄탄한 구성으로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책에서 구약성서 외에 주로 카톨릭이나 루터파의 생각에서도 중요시 다룬 성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초기 기독교 신학자, 중세 신학자, 그리고 루터와 쯔빙글리 등을 다루고 있다. 이 글에서 자기보다 앞선 수세기 동안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모아 체계화한 것이다. 

  「기독교 강요(Institutio)」가 십계명의 해석으로 시작한 것은 칼뱅의 법률존중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음에 신조문제(信條問題)를 취급했다. 그 외에도 신의 삼위일체설, 그리스도의 신성(성령잉태), 사후 부활이라는 형식으로 신앙을 확인하는 등의 내용을 확인 내지 재해석하고 있다. 칼뱅은 기독교의 구원문제를 카톨릭과 루터와 다르게 취급했다. 루터는 선행(善行)에 의해 구원이 얻어진다는 교회의 견해를 부정하고 오로지 신앙에 의해서만 얻어진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칼뱅은 오직 선택된 자들만이 신의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전례의 문제를 거론하여 세례와 성찬의식을 받아들이고 나머지 5개는 버리고 있다.

  끝으로「기독교 강요」는 종교개혁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교회와 국가와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인간은 두 종류의 지배체재에 종속되어 있다. 세속의 법과 신의 법이 그것이다. 세속의 법은 전반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신의 법은 세속 정부의 법이 잘못할 때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위로 무장하고 상위권력을 벌하는 것이다. 무장봉기나 폭동으로 전제적인 지배를 바로 잡는 것은 바로 신의 복수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의 주장은 결국 신의 법이 정부권력보다 높아 나중에 전 유럽에 전파되어 16세기에는 정치개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기독교 강요」는 나폴레옹 법전이 프랑스 혁명을 매듭지은 것처럼 종교개혁을 종결지은 작품이 되었다. 그래서 방종으로 흐르던 교의는 새로운 질서를 갖춘 교의가 되고 자유는 독재로 변했으며 영적인 흥분은 정신적인 규범이 되었다. 이 순간부터 개신교는 정신적으로 통합된 세계적인 힘으로 가톨릭교회와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개신교회의 권위와 질서는 바로 칼뱅의 이 작품으로 시작되고 집합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가게 된 것이다.

 

4. 잿빛도시 제네바

 

  1530년대 제네바는 상업과 제조업의 중심지로 번영하는 도시였다. 이 곳은 스위스 연방에 속하는 독립 공화정의 도시 국가에 속했다. 제네바는 다른 주처럼 시의 참사회에 의해 자치를 실시했고 또 종교 문제도 여기서 관장했다. 이곳 주민들은 상업중심지로서 풍요와 교회계율의 해이 등으로 도시는 소란스럽고 무질서하며 기강이 없었다. 이 도시가 사브와공(the Dukes of Savoir)의 억압에서 벗어나 새로 획득한 자유에 열광하고 있었다. 그들의 신앙내용은 개신교의 교리가 두서없이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설교사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은 이런 세태에 절망하고 있었다. 그도 교회내부로부터의 개혁을 바랬으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를 떠나 고독한 선교사가 되어 유럽전역을 한 마리의 고독한 이리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1532년 이후 그는 가끔 제네바를 방문했는데 이 도시에 있는 말썽 많은 무리들을 다스릴 지도자가 없어 분개하고 있었다.

  이 무렵 저 유명한 장 칼뱅이 프랑스 사브와 지방을 여행하던 중에 제네바에 하루 머물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칼뱅이 이 곳제네바에 도착했을 때 파렐은 그를 찾아가 만나 그의 진지하고도 견고한 정신을 간파한다. 파렐은 자기가 스무살이나 위였지만 이 순간부터 칼뱅에게 완전히 종속되었다. 그 후 그는 칼뱅을 자신의 지도자요 스승으로 삼고 그의 종이 되어 어떤 싸움에서도 칼뱅의 편이 되어 투쟁했다. 파렐이 칼뱅에게 이곳에 머물도록 열심히 설득했으나 칼뱅은 거절했다. 파렐은 신벌(神罰)을 들먹임으로써 칼뱅을 승복시켜 그를 제네바에 묶어두는데 성공한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제네바에 엄격한 규율을 확립하려 했다. 도박, 음주, 방가, 댄스 등에 비난을 퍼붓고 위반자는 추방했다. 그러나 제네바 사람들은 칼뱅의 규율과 엄격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화가난 시 참사회가 1년 6개월만에 두 종교지도자를 추방해 버렸다. 몇 년 뒤 시 참사회는 생각을 바꾸어 칼뱅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것은 시 참사회가 판단해 보아도 도덕의 해이는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혁운동이 가톨릭종파로부터 수세에 몰려 있었고 규율마저 무너져 제네바가 다시 사브와로부터 자치를 위협받기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패배한 도시가 정복자에게 행하는 태도로 제네바 시는 칼뱅의 입성을 준비했다. 그의 불쾌감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준비했다. 칼뱅이 요구한 그의 교리문답과 이미 요구한 계율을 그대로 지키겠다고 약속을 받아낸 것은 물론 말할 필요가 없다.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환호성을 지르며 다시 돌아오는 칼뱅을 맞이했다. 그가 다시 돌아와 이제 양처럼 부드럽고 온순한 도시를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그가 돌아와서 제일 먼저 행한 일은 우선 참사회를 설득하여 자기를 책임자로 하고 5인의 목회자와 6인의 시민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설치였다. 이 위원회의 결성으로 교회계율(discipline)을 만들어 시행했다. 이것이 개혁파 교회의 헌장이 되었으며 시 당국도 이것을 지지했다. 이 “교회계율” 덕택에 제네바 시는 칼뱅이 계획한대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로써 한때는 자유롭고 유쾌하던 도시 위로 잿빛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다채로운 의상들은 사라졌고, 종 탑에서 종이 울리지 않았다. 즐거운 노랫소리는 거리에서 사라졌다. 모든 집에서 장식이 없어지고 무미 건조해 졌다. 바이올린이 댄스곡을 연주하지 않게 된 이후로 주점들은 황폐해지고 당구대는 헛간에 처박히고 주사위는 테이블 위에서 사라져 버렸다. 무도장은 텅 비어버렸다. 사랑에 취해 산책하던 어두운 가로수 길에는 더 이상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일요일이면 아무 장식 없는 교회당에서 진지하고 말없는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고요히 침묵의 예배를 올렸다.

  그들은 시계처럼 규칙적으로 일하고 축제일이나 공휴일에도 전혀 쉬지 아니했다. 슬프고 싸늘한 시계소리는 단조롭고 질서정연하게 계속되었다. 낯선 사람이 제네바로 들어오면 이 도시는 상중(喪中)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사람들은 우울하고 차가운 눈길을 보냈으며 거리는 조용하고 즐거움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스토아적 금욕주의 분위기가 억누르듯 도시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교회계율” 그것은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했다. 칼뱅이 가져다 준 엄격한 절도와 통제는 여유로운 생활에서만 생겨나는 온갖 신성한 힘들을 죽여버린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였다. 제네바 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시인, 신학자,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고 자랑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칼뱅이 죽은지 200년이 지나도록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단 한 명의 화가, 음악가, 예술가를 배출하지 못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평범한 것을 위해 평범하지 않은 것을 희생시키고 모순 없는 노예근성을 위해서 창조적인 자유를 희생시킨 것이다. 풍성하고 자유롭고 심지어 소란스럽고 무질서해 보이는 제네바 시위에 이제 암울한 잿빛 하늘이 깊게 드리워진 것이다.  

 

5. 독재의 수단 : 테러, “교회 계율”(die Kirchenzucht)

 

  깡마르고 지적이며 엄격한 정신의 인간 칼뱅도 개인적으로는 분명히 피에 대해서 극단적인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제네바에서 행해진 고문이나 화형장에 참석할 수 없을 만큼 여린 감정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이나 망상체계에 의해서 이웃 사람들을 보호한다고 생각하면 그는 곧장 수 백 명의 사람들을 처형할 수 있을 만큼 냉혹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본인 한 사람의 지성적 금욕주의자가 수 천명의 삶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완벽하게 빼앗아 낼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이었던가. 모든 독재의 영원한 법칙인 테러가 그 수단이다. 체재 중심적이고 독재적으로 행해지는 국가 테러는 개인의 의지를 마비시킨다. 모든 개인은 스스로 의심받는다고 느끼면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겁에 질린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인해서 폭군 압제자의 명령과 심사를 미리 앞서서 헤아리고 수행한다. 칼뱅은 기적을 현실로 만드는 일에서 자신의 권위를 찾아냈다. 하나님 앞에선 모든 ‘죄인’에 대해 냉혹했고, 동정심을 버렸고, 그들을 벌하고 자기가 규정한 체계에 충실하게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단 한 명의 죄인이 하나님 심판 앞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차라리 죄 없는 많은 사람이 벌받는 쪽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칼뱅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자신의 뜻을 세워나가는 수단중의 하나가 “교회계율”이다. 이 계율은 그가 만들어 배포한 것이다. 그는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필요 없었고 완전한 권위가 아니면 완전한 포기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칼뱅은 자기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자기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증명할 필요없이 명백한 사실이 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할 은총을 내려주셨다.(Dieu ma fait la grâce de déclarer ce qúest bon et mauvais)"      

 

  자신의 가르침이 곧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이제 그가 곧 하나님의 대리자요, 나아가 하나님이 된 것이다. 이쯤되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완고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예언자처럼 자기에게 사로잡힌 편집광이 된 것이다. 인류는 언제나 도발적인 편집광에게 굴복하지만 단 한번도 참을성 많고 공정한 인간에게 굴복해 본 적이 없다.

  칼뱅이 제네바 시민을 하나님에게로 이끌어간다는 명분하에 도입한 저 유명한 “교회계율”, 인류는 이것보다도 더한 계율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조직의 명수인 칼뱅이 시민을 ‘양떼’(Herde)로 규정하고 자신이 ‘목자’가 되어 법조문과 금기사항으로 시민의 목을 죄어갔다. 이런 규율이 제대로 수행되고 있는지를 감시하는 기구가 “종교국”(Konsistorium)이다. 그 역할은 하나님을 순수하게 예배하도록 공동체를 감시하는 일이지만 사실은 모든 개인적인 생활이 종교국의 감독아래 놓이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종합적 감독체재가 도입된 이후부터 제네바에는 개인의 사생활은 사라진 셈이다.

  칼뱅이 돌아온 후 이제 제네바 시민들은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감시를 받게되었다. 도덕경찰관이 방문차 들리면 어떤 시민도 그걸 거절할 수 없었다.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누구나 할 것 없이 한 달에 한 번 이 직업 도덕감시자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야만 했다.

  도덕경찰관은 교리문답으로만 방문을 끝내지 아니했다. 손가락에 낀 반지는 몇 개나 되는지, 신발장에는 구두가 몇 켤레나 있는지, 여자의 머리가 너무 틀어 올려지지 않았는지, 스커트가 너무 짧지 않는지 등등. 제네바 시민이 여행을 떠나 다른 곳에서 불만을 터뜨린 내용까지도 보고되고 감시를 받았다. 이쯤 되고 보면 사랑의 밀어를 어떻게 속삭일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이 금지, 금지, 금지, 제네바 시민에게 허락된 일이 없었다. 일이 있다면 의무, 의무, 의무 뿐이었다. 죽고 사는 일, 복종하고 교회가는 일 외에는 모든 것이 금지요. 빵을 벌기 위해 일하는 의무, 주님께 봉사해야 할 의무 등등이다. 그는 사탄이 개인의 영성에 숨을 못쉬게 하려면 이렇게 자기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리하여 칼뱅의 가르침과 더불어 시민들의 모든 자유와 생활의 기쁨도 함께 사라졌다.

  칼뱅이 통치한 처음 5년 동안 이 도시에서 13명이 교수대에 목이 매달려 죽었고 10명이 기로친에서 죽었고, 35명이 화형으로 죽었으며 76명이 국외에 추방당했다. 그의 테러를 피해 적절한 시기에 도망친 사람의 숫자는 뺀 것이다. 감옥도 만원이었다. 선고받은 사람 뿐만 아니라 단순히 혐의만 받고 있는 사람에게도 너무나 가혹한 고문이 행해졌기에 고발당한 사람들은 고문이 두려워 먼저 목숨을 끊어 자결하는 사람도 많았다.

 

  제네바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칼뱅이 지배하던 시기보다 사형집행, 형벌, 고문, 추방 등이 더 많았던 때는 없었다. 발자크가 칼뱅이 종교라는 이름을 내걸고 감행한 테러가 프랑스 혁명의 피의 축제보다 더 심했다고 지적한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칼뱅의 “교회계율”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들을 규정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정말 우스꽝스럽다. 자크 그뤼에(Jacques Gruet)는 칼뱅을 위선자라고 욕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모든 시민이 끊임없이 조사받고 질문받고 선고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면 어떤 용감한 시민도 여기에 감염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교회계율” 덕분에 제네바 시는 정말 칼뱅이 계획한 대로 되어버렸다. 제네바에는 단 하나의 의지, 곧 칼뱅의 뜻과 의지만 있고 모두는 그것에 복종할 의무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칼뱅의 도덕적 금욕주의가 “교회계율”의 규정과 맞아떨어지면서 제네바 시는 문화적으로는 암흑의 도시, 침묵의 도시로 변하게 되었고 종교적으로는 진지하고도 경건한 도시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6. 칼뱅의 실체

 

  칼뱅의 실체는 아주 쉽게 찾아왔다. 제네바 시민들은 칼뱅의 무오류성을 조금이라도 의심을 했다가는 가장 잔혹한 형벌을 받았다. 술에 취해 칼뱅을 욕한 어느 출판업자는 불쇠 꼬챙이로 혀를 잘린 다음 그 시에서 추방되었다. 그런데 제네바 시에 페스트가 발생하여 창궐해 나갔다. 평소에 환자가 생기면 그 환자는 성직자를 자기 침대로 불러야 했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형벌을 면치 못하였다. 이 무렵 목사 한 명이 페스트에 감염되고 부터는 성직자가 페스트에 걸린 환자를 찾아오는 것은 고사하고 환자들을 페스트 수용소로 보내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시 당국은 적어도 종교국 소속의 목사 한 사람만이라도 병원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위로해 주길 간절히 원했다. 평소에 그토록 득달을 일삼던 종교국 소속 성직자들이 하나같이 꽁무니를 빼면서 환자들을 외면했다. 더욱이 칼뱅은 지도자로서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으로 간주되어 그는 공식적으로 빠져버린 것이다. 페스트 환자 몇 명을 돌보기 위하여 교회전체를 희생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로 많은 다른 성직자들도 페스트 환자 앞에서 숨어 버렸다. 시의회가 성직자들에가 온갖 간청을 다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어려운 시기에 개인적인 용기보다 더 국민에게 확신을 주는 행위도 없다. 다른 도시에서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기에 환자수용소로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였던 영웅적인 사제들은 영원히 추모를 받았다. 그런데 이런 결정적인 시기에 보여준 제네바의 성직자들은 비겁했고 민중의 불신을 사기에 족했다. 군대조직처럼 무장한 종교국 직원들의 강력한 자기 보호의지는 오합지졸의 힘없는 불만을 오랫도록 지배할 수 있었다. 어려운 시기에 보여준 지도자의 실체는 이렇게 허무하게 민중을 속이고 자신의 안일과 영달에 기울였다. 칼뱅의 냉혹한 지배력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힘을 조직화하지 못한 시민의 연대의식은 산만한 민중의 불만으로 메아리 칠 뿐이었다.

 

7. 나가기

 

  신정정치를 감행한 칼뱅의 통치는 제네바를 극단적인 모범도시로 만들었다. 엄격한 규율과 스파르타식 단련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성취했다. 칼뱅은 자신의 권력과 이념을 스위스의 좋은 도시 제네바에 한정시키지 아니했다. 그의 권력의지는 존 녹스를 통해 스코틀랜드를 굴복시켰고 네델란드와 북유럽의 왕국들도 얼마간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하게 만들었다.

  제네바 교회가 실현시킨 신정정치는 시민들을 눈에 띄지 않게 살면서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의무를 이행시키는 삶으로 몰아갔다. 시민들은 감각적이고 자유로운 정서를 몰아내고 억압되고 조직적인 인간들로 변해 버렸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자본주의 연구”에서 절대복종을 가르친 칼뱅 만큼 자본주의에 기여한 이념도 없다고 지적한 것은 맞는 말이다. 칼뱅의 종교교육은 네델란드, 영국, 신대륙 미국을 정복했다. 그들은 냉혹하고 끈질기고 결핍을 잘 견디는 선원과 개척자들, 즉 청교도들이 되어 이웃나라는 물론 외국까지 뻗어 나갔던 것이다.

  예술적 충동은 생명의 풍요로움과 여유에서 다양함을 들어낸다. 칼뱅이 기쁨을 없애는 사람으로 온 세상을 계속해서 정복해 나갔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단조롭고 우중충했을까. 음악, 회화, 극장 없는 세상, 춤이 없고 에로티시즘이 소멸된 17~18세기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는 시대이다.

 

  세계를 단 하나의 체제 속에 집어넣으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인간은 언제나 강력하게 저항해왔다. 칼뱅이 죽고 나서 그의 가혹했던 기율은 생명과 화해였다. 감각적인 삶은 언제나 추상적인 가르침보다 더 강하다. 인류의 기나긴 역사에서 독재란 잠깐동안의 과정일 뿐이다. 삶의 리듬을 방해하여 뒤쪽으로 끌어가는 힘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반동에 불과하다. 역사는 그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나아가기 위해 때때로 우리에게 훼방을 놓는다. 모든 폭력통치는 짧은 시간 지배하다가 차갑게 식어 버리고 그 시대와 더불어 끝나버린다. 정신적 자유는 영원히 되살아나 우리를 지배해 갈 것이다. 권력자가 자유정신을 폐쇄하고 승리를 구가해도 소용이 없다. 새로운 인간과 더불어 새로운 양심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칼뱅의 가르침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빨리 그 지나친 가혹함을 상실했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려고 했던 칼뱅주의는 이상한 방식으로 변해서 정치적 자유의 이념으로 바뀌어 나갔다. 압력에 대한 강한 반동이었을 것이다.

 

 

참 고 문 헌

 

Bainton, Roland H : The Reformation of the 16 century.

                    Beacon Press, 1963

Burns, Edward M : The Counter Reformation.

                    D. Van Nostrand, 1964

Daniel-Rops, Heri : The Catholic Reformation. E.P.Dutton, 1962

Harbison,E,Harris : The Age of Reformation. Cornell University

                   Press, 1962

McNeill, John T :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Oxford Universty Press, 1962

Zweig, Stefan : Castellio gegen Calvin oder Ein Gewissen

               gegen die Gewalt, Fischer Taschenbuch Verlag, Frankfurt A/M, 1983

Simith, Preseverd : The Age of Reformation. Henry Holt, 1947

 

 

Zusammenfassung

 

 

Die Geschichte von Zerosum

 

 

                                                    Young-Su, Lee

 

 

  Anhand historischer Ereignisse zeigte ich die Gefahren und das Übel der eignen Zeit im Spiegelbild besonders deutlich auf. Ich versuche dadurch zugleich der Mahnung Gültigkeit für alle Zeiten. Der Genfer Reformator Jean Calvin verwaltet die Lehre und Macht despotisch. Vor allem aber ergreift er die Partei und setzt unter Einsatz aller Kräfte den Kampf fort. Er schlägt Genf ganz nieder. Er ist die gefährlichste für seine Lehre geworden. Seine Maßnahme hat sich für die weitere Entwicklung einigermaßen gut und schlecht ausgewirk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