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이론

 

 

    한스 크루파

1)金 孝 全 譯*

 

 

 

[역자의 말]

 

  다음은 Hans Krupa, Carl Schmitts Theorie des Politischen - Mit einem Verzeichnis der Schriften Carl Schmitts -, Leipzig : S. Hirzel 1937. 47 S.의 한국어 번역이다.

  이 논문은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이며, 또한 슈미트의 이론적 발전을 규범주의, 결단주의, 그리고 구체적 질서사상의 세 단계로 파악한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번역에 있어서는 윤근식역, 카알 슈밋트의 「정치적인 것」의 이론, 법문사, 1961 및 일본어 번역 服部平治·宮本盛太郞 編譯, 政治思想論集, 社會思想社, 1974, 129-193면을 많이 참조하였다.

 

 

서 문    

 

 

  이 논문이 다루는 것은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결단주의적 이론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에서 정치적 자유주의와 법실증주의에 대한 국가학에 있어서의 중요성을 지니게 된 저 비판을 고립화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속에 가장 인상깊게 표현된 결단주의적 해답을, 1914년의 『국가의 가치와 개인의 의의』에 대한 엄밀하게 규범주의적인 저서로서 시작된 발전의 한 단계를 긋는 것으로서 파악하려고 노력하며, 다른 한편 상세한 분석에 근거하여 슈미트로 하여금 정치적 결정의 학설을 1934년에 프로그램화하여 공표한 구체적 질서와 형성의 이론에 대체시킨 (칼 슈미트에 의해서는 중요한 곳이 명확하게 서술되지 않고 있다) 이유를 명백히 할 것이다.

 

 

Ⅰ. 칼 슈미트의 이론적 발전과 저작

 

1. 이론적 출발점으로서의 19세기의 자유주의비판

 

  칼 슈미트의 여러 저서들은 바로 전후 독일의 가장 인상깊은 학술적 출판물 속에 들어간다. 그 중에서도 『정치적인 것의 개념』1)이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이 논문은 시민적·자유주의적인 법치국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입헌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찾아내기 위하여 이 이데올로기를 파괴한다. 이 논문은 자유민주주의적 서유럽의 권력정치를 위장하고 있는 가면인 정치적 설득, 비방, 그리고 차별이라는 격정에 찬 표어와 이데올로기적 방법으로 결합되어 있는 主知主義的인 가면을 벗긴다. 그러나 이 논문은 (전통적으로) 정통적인 정치과학으로서의 국가학이 관제 이데올로기의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법학적 실증주의 - 아마도 칼 슈미트는 이 방면의 제1인자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른바 비인 학파(한스 켈젠[H. Kelsen]의 「순수법학」과 한스 크랍베(H. Krabbe)의 국가의 법이론)2)의 기본개념과 어법 중에는 잘 알려져 있는 자유주의적 어휘의 개념이 반복되고 있다.3) 그와 같은 일견 「중립적」이며, 「몰가치적」인 표현들은 「법의 권위」, 「법주권」(크랍베)이라는 것, 또는 「규범의 지배」(켈젠)이며, 오펜하이머(Oppenheimer)의 「정치적 수단」과 「경제적 수단」의 구별도 이에 속한다. 이들과 반대로 슈미트는 정치적 현실 자체에 파고 들어 정치적인 것을 「실존적」인 규모로까지 높이려고 한다. 그러나 슈미트의 그 이외의 거의 모든 저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위의 논문도 19세기와 20세기의 자유주의세계에 대한 투쟁적·논쟁적인 논문이며,4) 그리고 그 논쟁적인 경향 중에는 아직도 정치이론을 위한 어떠한 실증적 강령도 포함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주의하여야 한다. 이러한 식으로 놀라운 비판이 존재하나, 이 비판은 부정적으로 스스로 없어지고 만다. 그 이유는 그러한 비판은 정립과 反定立이라는 단순한 대립에만 입각하고 있으므로 「자유주의적 분리 사상」(후버[E.R. Huber])5)이라는 의미에서 「이원론」을 이루고 종합을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암(G.Dahm)6)은 슈미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이 결단론은 자유주의적 규범주의를 현실적으로 극복하는 길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 결단론에서도 정신적이며 정치적인 조치는 대립적 정립을 수락함으로써는 결코 극복될 수 없다는 보편적인 정신사의 법칙이 입증된다. 그 까닭은 모든 대립적 정립은 상반하는 징조를 지니고 있는 극복된 정립을 반영하며, 그 정립의 어느 정도의 존속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논쟁적인 태도가 칼 슈미트의 모든 저서의 특색을 이루고 있다. 이 태도야말로 규범주의로부터 결단주의를 지나 구체적 질서이론에로의 일대 추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슈미트의 이론적 발전의 모든 국면에서 그가 공격하는 적대자 그 자체가 언제나 정치와 철학으로서의 자유주의인 한에 있어서 그의 사상의 지속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부여되는 것이다.

 

2. 결단주의 이전, 즉 가톨릭적 규범주의

 

  이 세계에 대한 비판은 『국가의 가치와 개인의 의의』7)라는 법철학적 논문으로 시작되는데, 이 논문은 가톨릭적 법학과 국가학을 그 정신적 근원으로 삼고8) 힘에 대한 법의 우위라는 의식적 규범주의를 주장한다. 즉「국가는…법조직이다. 이 법조직의 의미는 오로지 법을 실현하고 개개의 인간의 지배와 외계의 제도에 대한 법사상으로부터 추론되는 여러 조건에, 가능한 한 부합하는 외부세계의 상태를 초래하는 임무에 존재한다」(S.52). 1914년의 논문은 특히 언급하고 강조할 만하다. 그 이유는 이 논문이 법철학의 2대 문제와 「정치적인 것의 이론」, 따라서 「결단사상」의 이론을 특히 선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규범(법)과 의지, 또는 권력(국가)은 서로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2) 법은 윤리와 동일한가?-이러한 문제에 대답하기 위한 전제는, 법은 (물리적이며 심리적인) 힘을 포함하는 「사실」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권력과 법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법이 권력에 대해서 독자적이고, 의존하지 않는다면 그로부터 당위와 존재의 대립에…부합하는 2원론이 결론된다」(S.20). 슈미트는 국가를 통해서 강제라고 하는 하나의 경험적 요소가 법에 귀착되나,--그리고 자연법과 실정법의 구별을 제약하나--그러나 이 강제는 권력에 대한 법위 우위(S.2)와 이 양 영역의 논리적 모순으로 인하여 법의 본질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2원적 사고에 찬성하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제1문에 답변하고 있다. 즉 「만일 사실적인 타당성이 그 실증성을 구성하기 위하여 법에 귀속된다면 그것은 피상적인 것으로…비본질적인 것으로 귀속되는 것이다」(S.20). 「엄밀히 말한다면 법과 권력의 두 세계는 상호일치하지 않는 독자성 속에서 병존하고 있음에 틀림없다」(S.22). 반대로 법을 실현하는 임무만이 국가에 귀속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권력은 법 없이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S.108). 이 점에서 물론 국가는 어떤 법률을 실현하는가라고 질문할 경우에 두 문제가 교차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국가가 실현하는 법이 실정법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비실증적인, 말하자면 국가가 설정하지 않은 법의 요소를 문제로 삼을 때에만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특수한 규범적인 요소로서 특징지운다. 그리고 나아가 문제가 되는 점은 그의 본질이 어떤 점에 있으며, 또 어떤 점에서 윤리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가이다. 슈미트의 대답은 분명하고 일의적인 답변이 아니다. 즉 「법에 있어서 자율은 개인이 자율의 소지자로서 간주되는 윤리에 있어서의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S.101)을 의미하였다는 둔사나, 또는 「법과 도덕의 대립은 권력과 규범의 대립이 아니」(S.68)라고 하는 명제는 단순한 부정으로서는 마치 법이 그 비국가적 본질에 있어서 자연법에 통한다고 하는 짤막한 시사가 충분치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족하지 못하며, 이 문제의 핵심적 의의 때문에 특수적으로도 충분한 명제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이 초기논문 가운데서 슈미트의 법(규범)과 도덕(윤리)의 관계에 관한 연구가 규범적 규준에 대한 명확하고도 일의적인 주장을 하지 않고 짤막한 시사와 칸트 및 신칸트학파의 법철학에 반대하는 긴 항의(S.56)를 시종일관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슈미트의 특징적인 하나의 논증방식을 찾아볼 수 있다. 초기의 슈미트의 이론이 비록 규범에 의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가치에 관한 논문은 그 논리적 구성에 있어서 정치적 결단주의의 2원적인 대립적 구성과 완전히 일치한다.

  정치적인 것은 「일정한 사회적이며 국가적인 권력의 여러 요소의 취급과 지배」를 의미하며 정치를 마키아벨리(Machiavelli)가 정치생활의 외적인 개개의 요소를 격리시킴으로써 「단순한 기술」(S.22)로 만든「마키아벨리적 정치의 개념9)」을 거부하고 있는 한, 슈미트의 『로마 가톨릭주의와 정치형태』(1923)10)라고 하는 소논문도 강력히 「규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어떠한 정치체제도 권력유지의 단순한 기술만으로서는 한 세대도 지속하지 못한다. 이념도 정치적인 것에 속한다. 그 이유는 권위없이는 어떠한 정치도 존재하지 못하고 또한 어떠한 권위도 확신의 에토스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3. 결단주의, 즉 반자유주의

 

  슈미트의 이론 중에서 더욱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19세기의 주요한 법이론과 국가이론에 대한 규범적 내재적 비판보다도 결단주의적인 문제해결책이다. 이것은 칼 슈미트의 정치적 결단주의의 국면이 전개되기 시작한--언급되지 않은--독재연구의 이론적 기초11)를 이루고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그 본질과 해석의 절정에 달하고 마침내 『법학적 사고방식의 세 유형에 관하여』(1934)라는 논문에서 극복된다.

  원리적으로 정치적 결단주의의 두 가지 형식이 가능하다. 즉 (국가없는) 결단 일반과 좁은 의미에 있어서의 국가의 결단이 그것이다. 칼 슈미트도 물론 예리하게 양자를 구별할 수 없는 정치적인 것의 두 가지 정의를 제시한다. 그것은12)

  1. 정치적이라는 것은 비일상적인 「비상시」 바꾸어 말하면, 무력투쟁이나 전쟁시에 있어서의 단순한 힘에 의한 「동지와 적」의 모든--몰주관적인--「결단」을 말한다.13)

  2. 정치적인 것에 관한 둘째의 해석은 첫째의 해석과 결부되고 정치적 결단의 주체를 규정한다. 이것은 합법적 정치적 통일체인 국가에 의하여 충돌할 경우에 나타난다. 국가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전제로 하고, 국가 그 자체는 「결단」을 하는 경우에 결정적 상황이며, 따라서 사유할 수 있는 많은 개별적인 지위와 집단적 지위에 대하여 국가 자체도 하나의 지위에 불과한 것이다.14)

  제1과 제2의 정식화의 기본개념은 「결단」(Entscheidung) 또는 「결정」(Dezision)이다. 그리고 정치 원칙상 이 두 주의가 일치하는 까닭에 우리는 이를 다같이 정치적 결단주의(politischer Dezisionismus)라고 부른다. 그것은 방금 기술한 이른바 국가의 개념규정으로부터 추정되는 바와 같이, 이것은 전혀 비본질적인 것, 즉 구체적인 정치적 주체로서 간주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정상화된다.15)

  정치적 결단주의는 일반적으로는 (게르버[F.K.v. Gerber], 라반트[P. Laband], 옐리네크[G. Jellinek], 안쉬츠[G. Anschütz]의) 법학적 실증주의와, 특수적으로는 이 법학적 실증주의의 방법적·체계적 완성인 순수법학16)에 대하여 항의를 제기한다. 이 순수법학은 국가생활의 모든 현상을 실정적으로 통용하는 법으로 환원하여 그것을 개개의 규칙이나 제정법의 총합으로 규정함으로써 국가와 법을 동일시한다.17) 법학적 실증주의의 정신적 구성원칙들과 자유주의적 법치국가의 정치적 현상간의 관련성에 관한 가치있는 인식은 도외시하고 슈미트는 비상사태, 특히 전쟁에서 주장되고 강행되는 물리적 권력인 힘이 정치적 존재에 속한다는 것을 설복조로 설명한다. 그러나 슈미트는 그의 유일한 논쟁적이며 2원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이 요소를 일면적으로 절대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정치적인 것을 「존재적인」18) 규모로 기술하였다. 그 이유는 동지와 적의 구별은 결단의 무내용성의 결과로--결단은 임의의 상이한 여러 상황에서 모든 가능한 집단에 고유한 것이다--두 가지의 비변증법적인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는 대립들이나 2원론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일상과 예외의 대비, 규범과 결단의 동일화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것이 도출된다.

  (a) 존재와 당위의 분리, 정확히 말하자면 충돌시나 투쟁시에 있어서 자연적인, 바꾸어 말하면 순수하게 권력으로 충만한 존재와 「일상적」인 관계들의 실정적·법률적 당위의 분리, 정상상태는 어떠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즉 우리가 정상상태를 오로지 법학적·규범적인 범주로서 파악할 수 있는가 또는 권력의 요인들을 고려하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만일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규범이 「의지」(권력)에 비례하는 것과 같이, 두 개의 결단주의적 사상범위의 결정적인 논문, 즉 『정치적인 것의 개념』과 『정치신학』으로부터 일의적으로 추정되지 않는다. 비상시에 입각한 실천이 단연 잔존하고 있다. 따라서 문제를 규범없는 비상사태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이 비상사태는 특수한 정치적인 것인가 라는 두 가지 질문에 있는 것이다.

  (b) 정태와 동태라는 의미에서 비정치적 존재와 정치적 생성간의 분리.19)

  이 견해는 정치적 비상사태와 동지와 적의 구별집단화를 동일시하는 까닭에 제1의 어법에 관해서 언급한 바가 정치적인 것의 제2 어법 즉, 국가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과의 동일성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다음에 이것은 「모든 인간결사의 동질성」이라고 하는 명제를 주장하는 다원학파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특히 자유주의의 2원적 구조20)와 자유주의의 비정치화(사유화)와 중립화21)의 시도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이 견해는 19세기와 20세기 초의 독일의 정치구조의 구체적인 관찰로부터 획득된 것이며, 제2제국의 2원적 구조, 독일 제국에 있어서의 국가와 사회간의 긴장, 제2공화국22)의 「타락형태」23)인 바이마르 공화국에 있어서의 다원적이며 무정부적 사회에 의한 국가의 해체 등에 해당된다.

 

4. 결단주의 이후, 즉 구체적 질서思想과 形成思想(국가사회주의)

 

  오늘날 우리는 본질적으로 다른 현실과 관계가 있다.24) 특히 19세기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현대의 3대 정치「운동」 즉, 국가사회주의, 파시즘, 볼쉐비즘 속에서 전체적인--바꾸어 말하면 전체를 대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25)--슈미트의 의미에서--특수한 정치적 기능을 가진 정당이라는 새로운 정치조직이 대두한 결과, 우리는 동지와 적의 이론의 창안자와 더불어 (좁은 의미에 있어서의) 국가는 이미 정치적인 것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26) 이것은 슈미트로 하여금 국가사회주의혁명 후에 『국가·운동·민족』(1933년)이라는 논문 중에서 「정치적 통일체의 세 요소」를 위하여 국가와 정치와의 동일성을 포기케 하였다.

  슈미트의 이론적인 개념에 관해서는 다만 『법학적 사고방식의 세 유형에 관하여』(1934)라는 논문의 수면에서 암시되고 있는 새로운 「定義」는 정치적인 것을 「구체적 질서」(「형태」, 「제도」)27)로 고쳐쓰고, 그것을 정치적 통일체라고 표명하고 있다. 이것은 결단주의와 명백히 대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개의 주석을 도외시한다면 정치적 결단의 범주가 무슨 까닭에 불충분하거나 부족한 것인지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사실 구체적 질서의 사상은 완벽한 정치적인 것의 이론에 대한 유일한 가능적 토대를 제공한다. 이것은--결과적으로 생각하면--정치적인 것은 순수한 규범으로서 표명되는 것도 아니요, 결단의 힘만으로서 표시되는 것도 아니고 구체적인 통일체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실정법과 결단, 즉 정태적 상태와 동태적 생성 간에 생길지도 모르는 긴장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는 생각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정치적인 것을 그의 구체적인 담당자 또는 주체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한 것은 실패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것은 정치적인 것의 「정의」도 아니다. 슈미트는 구체적 질서에 의한 해석을 그 자체로서는 다만 정치적 사유에 이끌 뿐이며, 비록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대단히 많은 「통일체」와 관련을 가진다. 국가, 민족, 군대, 신분은 동일한 정도로 실존적인 질서이며, 따라서 정치적인 것이다. 형성의 思想은 수많은 (「다원성」) 정치조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만족하게 여기는 위험에 직면한다.28) 그것은 추상적으로 추론되거나 자의적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고 현실 자체 내에 가로 놓여 있는 질문을 통하여 보충되어야 한다(그리고 그에 부합하는 대답이 정밀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즉 구체적 질서는 상호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는가, 位階制 또는 그 이외의 「실존상」의 구별에 입각하여 구성되고 있는 민족, 국가, 정당, 계급 등의 전체 질서가 존재하는가, 또는 다원학파(특히 라스키[H.J. Laski]와 콜[G.D.H. Cole])는 그의 수미일관된 방향으로 사회적 통일체들의 정치적 병렬을 주장하는 「모든 인간결사의 동질성」이론은 정당한 것인가?29)

  우리는 일반적인 문제들을 개관적으로 나타낸 후에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에 관한 이론의 고유한 진술과 그 근본사상의 구명에 착수하고자 한다.

 

 

Ⅱ.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이론

 

  제1장 정치적 결단(결정)의 두 가지 해석

 

1. 정치적인 것의 국가 없는 개념--일반적 동지와 적의 관계

 

  칼 슈미트는 「규준이라는 의미에서 반박의 여지가 없는 정의나 내용표시」30)로 생각되지는 않고, 또한 정치적인 것을 「결단」으로 바꾸어 쓴 개념규정, 즉 「고유한 정치적 구별은 동지와 적의 구별」31)이라는 개념규정으로서 그의 고찰들을 시작한다. 정치적인 것은 미적인 것, 윤리적인 것, 일반이나32) 또는 종교, 경제, 언어, 문화 및 법에 있어서의 독자적인 실체33)와 같은 순정신적인 범주도 아니요, 또는 교회, 가족, 노동조합과 병렬적인 결사로서 이들 결사 중의 정치적 「집단」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다른 영역에 있어서는 본래의 정치적인 것은 존재치 않는다. 「정치적인 것의 특색은 바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인간 활동의 영역이 정치적일 수 있다는 점에…있다. ……정치적인 것은 어떠한 자료와도 결합될 수 있으며, 그 자료에…다만 하나의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공공이익에 관계되는 것은 모두 여하튼 정치적인 것이다.」……34) 왜냐하면 정치적인 것은 「통일체의 강도만」35)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통일체의 최대강도의 특색을 표시하며, 따라서 이로부터 가장 강렬한 구별, 즉 동지와 적에 따른 구별집단화도 규정된다. 정치적 통일체는 최고의 통일체이다.……왜냐하면 정치적 통일체는 결단하고 그 자체 내에서 모든 대립적 집단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적대관계(즉 내란)에까지 분열하지 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36) 「정치적인 것은 고유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의 지평은 모든 영역으로부터 획득될 수 있으며, 교회, 노동조합, 콘체른, 국민과 같은 모든 사회집단은 이 최고도의 강도점에 접근할 경우에는 정치적인 것이 되고 따라서 국가적인 것이 된다」.37)--따라서 모든 사회조직체는 그 개별성에 있어서 정치이론에 결정적인 것이 못되며 정치적인 것은 현실적인 (그리고 가능적인) 동지와 적의 관계의 세계인 것이다. 슈미트에 있어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 자체의 실체에 관해서는 하등 논술치 않고 다만 사적이 아닌, 즉 공적인 생활범위의 해석을 제공할 뿐이다」.38) 따라서 동지와 적의 구별은 다만 공적인 것의 표식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 구별은 그의 일면적인 적대분리자의 강조 때문에 쇄플레(A. Schäffle)에 의하여 독일 국가학에 소개되고, 그 후 스멘트(R. Smend)에 의하여 규정된 「統合」39)의 범주를 통하여 보충되어야만 하였다. 쾰로이터(O. Koellreutter)도 슈미트는 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 즉 동지와 적의 설정으로 다만 정치적 대립을 기술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40)

  저자의 定義의 실질적 설명은 순부정적인 것이며 정치적 적의 규정을 초월하는 것이다. 적은 「도덕상으로 악하지 않음」이 필요한 것도 아니요, 또는 「심미상 추할」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적은 경제상의 경쟁자가 아니고 「별인이요, 타인이다」.41) 그러나 이것은 규범적으로나 또는 정신적으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실존적(existenzielle)인」 규모로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즉 「적의 개념에는 현실의 영역 내에 존재하고 있는 여기서는 전쟁을 의미하는 무장적 투쟁의 미필성이 속하고 있는 것42)」이며-- 그리고 그의 역할은 개인적 적과 상대방이라는 사적인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므로 적은 공적이다. 그 이유는 그와 같이 투쟁하고 실행하는 인간의 전체, 특히 전체 국민에게 관계되는 것은 모두 공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적은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公敵(hostis)이요, 私敵(inimicus)이 아니다……」.43) 슈미트는 물론 그 부정적 면에 따라서 공적인 것에 대한 훌륭한 현상학을 제기하나, 정치적 타인에 대응하는 「공적 동지」의 기술을 결여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통일체의 강도」를 정치적인 것의 기초로 간주한다면, 동지와 적과의 관계는 비유적으로 보아 한쪽 극이 최강도의 결합을 나타내고 다른 쪽의 극이 극단적인 격리, 즉 무력전이나 전쟁을 나타내는 저울로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零點이 놓여 있을 것이다--그런데 동지와 적의 공식은 한층 나아가서 그 학문적·이론적 구조에 있어서는 비이제(L.v. Wiese)가 그의 『일반 사회학』(Allgemeine Soziologie)44)에서 제기한 인간관계의 표와 합치한다. 폰 비이제의 분류규준은 결합과 분해에 있다. (이것은 동지와 적의 구별에 대응한다). 모든 인간「관계」(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회과정」)는 「병존」, 또는 「분리 및 연립」(Aus-und Ohne-einander)의 여러 과정들이다. 「통합」과 차별이라는 양 계열은 순형식적인 징표에 따라서, 즉 「운동의 방향과 리듬」에 따라서 획득되는 단계적 등급을 표시한다. 폰 비이제에 있어서 「형식적」이라는 표현은 내용적으로 규정된 관계들과 「조직」(Gebilden)을 고려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으로, 칼 슈미트의 정치이론으로 전용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즉 정치적 주체의 자의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질적인 것은 사회조직의 특수방식이 아니라 집단적인 또는 사회화된 존재, 즉 공적 존재 일반이다. 「제1차적 질서」의 사회과정들과 동일한, 즉 개별 인간들간의 그와 같은 사적 우호관계나 또는 적대관계에 반해서 공적인 동지와 적의 구별은 사회조직 내에서, 또는 그 조직 사이에서의 「제2차적 질서」의 관계를 표시한다. 정치적 대립은 비개인적이기 때문에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사회적 관계이다.

  폰 비이제가 전제들에 따라서 모든 구체적 상황, 모든 사회적·역사적 개별성을 형식적인 개념적 발판으로서 분석하려고 하는 관계들의 표를 얻고자 노력하는 반면에, 슈미트는 의도에 따라 국가, 국민, 계급과 같은 모든 현실적 질서에 ……적용될 수 있는 적대적 (그리고 화해적) 종류의 단계적인 강도관계의 도식의 계획을 작성한다. 동지와 적의 관계에 따르는 등급화가 예를 들면 전쟁과 내란은 대립적 최강도의 특색을 표시하는 까닭에, 전쟁과 내란의 본질적인 차별을 제시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하여 사실상 일반적인 정치적 강도를 제도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까닭에--슈미트는 동지와 적에 관한 결단에 해당하는 주체인 국가로 설정하고,45) 자유주의적 제한들을 내포하고 있는 시민적 입헌주의와 강력한 전체국가를 대립시킨다. 그런데 이 전체국가의 힘은 전쟁에 의한 대결시에 명백하게 되는 것이다(정치적인 것의 제2해석). 따라서 「외부의 적에 대한 전쟁과 내부의 폭동진압은 비상상태가 아니고 법과 국가 내에서 그의 내적합목적성을 직접적인 힘으로써 전개시키는 이상적인 정상사태이다」.46)

  동지와 적의 이론에 관한 제1해석이 내용이 없고 불완전하다는 것도 정당하다. 그 이유는 이 해석은 누가 적(또는 동지)이며, 누가 그를 그와 같은 것으로 규정하며, 왜 그가 적이냐고 하는 질문에 아무런 답변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족과 시대가 다름에 따라 우연히 「상황」과 「충돌」로부터 생길 뿐만 아니라 일정한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적의 「실체」(세계관, 인격적 통합, 전통)에서 생기는 다른 적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정치적 결단론은 국가사회주의적 정치이론과 초민족적인 국제주의와 제국주의의 독단론의 근본적 차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특히 역사를 경제계급의 권력투쟁으로 환원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방식은 자본과 노동, 기업가와 노동자,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적 알력에 이롭도록 모든 알력을 대립시킴에 있어서 동지와 적이라는 도식의 성과를 이용한다.47) 따라서 동지와 적에 의한 구별은 특수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제공하지 못한다. 마르크스 주의와 국가사회주의에 동시에 적용되지만 이 양자의 본질적인 차이를 제시하지 못하는 이 이론은 추상적·형식적인 것의의 영역에 머무르는 것이다.

 

2. 정치적인 것의 국가적 개념, 즉 정치적인 것은 국가적인 것이다.

 

  정치적인 것에 관한 제2의 해석은 심급, 즉 정치적 결단의 주체를 제기한다. 슈미트는 공적은 바로 민족의 적을 의미하는 他者라는 조형적인 표현과는 정반대로 정치적 결단의 주체와 국가를 동일시한다. 우리는 슈미트에게서 국가의 정치적 우위에 대한 논증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는 오직 지난 수세기 간의 유럽 역사에 있어서 국가는 정치적 통일체의 고전적 형태를 표현한 것임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48) 그래서 그는 정치적인 것과 국가적인 것의 동일성에 도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것」은 「국가적인 것」이다. 즉 「우리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 속에서 이미 국가의 개념을 생각하였다」49)고 하는 옐리네크(Jellinek)의 명제가 논의된다. 즉 슈미트는 부여된 조직체로서의 국가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정치적인 것을 전제하며 또한 원래의 정치조직과 기타의 모든 비정치조직의 전체의 전통적인 대립으로만 내버려 두지 않고, 그 양조직 간에 정치상 관계있는 의미의 계열을 삽입함으로써 본질적인 수정을 가하였다. 따라서 결정적인 정치적 통일체와 의미로서의 국가 이외에도 기존 국가와의 관계를 통하여 특징지워지는 수많은 2차원적인 정치적인 것 개념이 존재한다. 우리는 종교정책, 또는 사회정책에 관한 것을 논한다. 제2차적 여러 정치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이 관계들이 평화스러운 정치적 통일체 내에서 대립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면 사회정책적 문제가 최고의 정치적 강도를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사회정책적 문제가 매우 심한 대립을 초래함으로써 동지와 적의 구별을 초래하고 그 결과 이 해결을 위한 투쟁이 내란으로 변하고 또한 국가의 완결된 통일작용을 밖으로 붕괴시킨다.50)

  따라서 동지와 적에 대한 결단은 「극단적」이고 동시에 특수한 정치적인 경우를 위한 물리적 폭력, 즉 전쟁을 적대집단의 「최후수단」으로서51) 준비하고 있는 국가에 의하여 보통 행해지는 것이다.52) 「정치적인 것」은 한편으로는 「사회」의 다원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요구들과 경향에 대한 정치적 전체성53)과,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에 있어서의 국가가 표시하는 확증 때문에 국가권력을 의미하거나 또는 국가적인 것의 우위를 의미한다.

  우리가 행하여야 할 모든 결단은 물론 그 결단이 이를 결정하고 적용할 일정한 상황을 전제로 한다. 「구체적이라고 하는 것이 정치적 사유에 있어 가장 기본적 요구에 속하는 것이다」.54) 그러나 정치적 결정의 본질이 동지와 적에 따른 대립적 집단화에 존재한다면, 모든 정치적 개념은 논쟁적인 의미를 가진다.55) 그리고 노동자, 사회, 엘리뜨와 같은 그 자체 일견 중립적이며 일반적인 말은 현실적인 정치적 성격 또는 적어도 가능적인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실재적 조직들은 슈미트에 있어서는 그 조직들이 동지와 적의 구별과 권력충돌을 야기시킬 가능성이 있거나 또는 이를 전제로 하는 한 구체적이며 정치적인 것이다. 이 조직들은 그 개성을 그의 실체적 존재를 통하여 그 자체에서 획득한다든가, 또는 민족이라고 하는 구체적으로 더 큰 전체와의 관계에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투쟁상황 그 자체로부터 획득한다. 이 조직들이 국가적인 것으로 될 정도로, 바꾸어 말하면 이익사회의 운명에 대하여 결정적인 모든 범위를 합일시킬 정도로56) 정치적이라는 명백한 시사도 그 조직들의 정치적 구별의 실제적 가능성을 투쟁적인 설명을 목적으로 하여 나타내는 한에서만 정당화된다. 그 까닭은 그 경우에 국가적인 것은 완전히 정치적인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민족의 정치적 통일체로서의 구체적 질서사상을 상기하는 국가의 정의 자체는57) 구체적 통일체로서의 민족이 가지는 본질적인 정치적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며, 정치적 결단에 있어서 일면적으로 국가적인 것을 집어넣는 것이다.58) 그것은 결국 다원론적 이론으로 설명함에 있어서 그것이 오직 국가를 기타의 여러 결사로부터 분리시키고, 다원론의 여러 결론을 극복할 수 있을 정치적인 것의 기준이라고 하는 사실에 의하여 확증된다.59)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주의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만 정치적인 결사나 또는 단체를 다원적으로 종교적·문화적·경제적 또는 그 외의 단체와 병렬할 수 있으며, 또한 국가를 이들 단체와 경쟁상태에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충돌의 경우뿐」이기 때문이다.60)

  결단주의적 동기에 입각한 이러한 일면적인 실행은--이는 단순한 결단 이상의 정치적인 것에 속한다-우리가 「정치적 결단주의」라는 문제 아래 (정치에 관한) 제1해석과 제2해석을 결합할 경우에 정당화된다. 「국가」라는 규모를 채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자의 설명 자체도 독일 민족국가와 볼쉐비즘적 계급독재국가와 같이 대단히 본질적으로 상이한 국가를 분리시키기 위한 손잡이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 설명은 순수한 결단으로서는 그로부터 결정될 아무런 실체(민족, 세계관과 같은…)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2장 政治的 決斷主義의 前提들

 

1. 규범주의로부터의 이탈, 즉 공적 생활의 기본개념상의 시대적 피구속성. 비상상태의 이론으로서의 정치적 결단주의

 

  동지와 적에 관한 결단 또는 결정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의 정의는, 그 정의의 논쟁적 의도에서 명백해진다. 결단은 법적 규칙이나 법규의 단순한  정상적인 작용과 반대방향을 지향하는 것이고 또한 비상상태와 충돌시에 관계하고 독재의 시기와 순간에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이 정의는 『정치신학』61)속에서 진술한 「모든 법규, 모든 규범 및 모든 공준은 비시간적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 상황의 규정을 의미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출판의 자유의 요구는 원래 「반동적」인 군주들의 절대적인 간섭에 반대하여 나타난 것이다. 이 반동적 군주들이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점점 권력을 상실하고 결국 붕괴함에 따라 (현실적) 권력은 대자본주의적인 이익집단으로 넘어갔다. 그때부터 출판의 자유는 적대자인 절대군주가 근절되거나 또는 소멸한 까닭에 우발적인 것이었다.62)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의 자유에 대한 요구는 지속하였고 한층 더 「국가」에 반대하게 된 것이다. 출판의 자유를 갈망하던 대도시의 대중들은 자기들의 요구가 무명의 금융자본이라는 자기들의 고유한 경제적·정치적 적대자의 급진적인 욕구들의 구실로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국가가 스스로 「사회」의 신세력에 의해서 전도되지 않는 한,63) 국가는 위장한 적을 성공적으로 방지하기 위한 유일한 권한있는 기관(Instanz)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는 규범이 정상적인 상황과 정상적인 형태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규칙은…그 규칙을 정하게한 변화하는 사정」에 따라서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64) 「모든 법은 상황의 법(Situationsrecht)이다」. 그리고 모든 규범은 동질적인 매개체를 필요로 한다.65) 이 사실을 이탈한다면, 즉 규범의 기초로 되어 있고 그 규범에 적합하였고, 그 규범의 효력 일반이 비로소 가능하였던 상황이 없어지면 현실 정치적 변화로 말미암아 창조된 새로운 상황이 생기고, 그리하여 종래에 타당하였던 법률, 규범, 규칙 등은 그 이상 더 새로운 상황으로서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권력관계는 변하여도 법관계는 그대로 잔존한다. 그 때 만일 「모든 현존질서의 정지」가 생긴다면, 「비상상태」가 대두하고 「주권자란 비상사태를 처리하는 자」로 된다.66) 그런데 이 비상상태를 처리하는 자는 자기의 규범대립이 윤리상 정당화--「합목적」--되는가, 그리고 (또는) 자기가 실정법에 따라서 --「법적으로」--최고의 심급으로서, 또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권한이 부여되어 있는가하는 문제가 독재자(또는 주권자)에게 함축성있는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닐 경우에 독재화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장래의 권력관계들에서 나타날 구조는 미리 규범적으로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정치적 결단주의도 「정규의」 법적으로 보편적인 기본개념, 즉 규범적인 기본개념으로 환원될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이며, 오히려 그 결단주의의 정신적 핵심은 단순한 권력에만 의하여 결단을 함에 있으며 -전제된- 정치적 통일체, 예를 들면 「국가」의 내부에 존재하며 제약하고 있는 모든 대립은 바로 이 단순한 권력에만 의하여 최종적 결과인 내란을 회피하고 국가의 통일성을 내부로부터 수호하기 위하여 상대화되어야만 하는 것이다.67)

 

2. 정치적 개념의 초법적 성격

 

  결단과 예외를 「법학적」 범주들로 파악한다는 것은 확실히 오해를 범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예외적인 사태가 혼란인 것이 아니라 가령 그 상태가 「무법질서」를 나타낸다 할지라도 「법학적인 의미에서」는 여전히 항상 하나의 법질서이며, 또한 국가가 「자위권에 의거하여」 법을 정지시킬 수 있다고 하는 슈미트의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예외적인 사태에 법적인 것이 전제되어 있다고 고집하는 한, 모든 규범적이며, 법적인 것은 규범화되지 못한 존재상태에서 존재하게 되는 결단을 위하여 소멸한다고 하는 것은 물론 충분히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 즉 「예외적인 경우에 규범은 절멸한다」.68) 「이 점에서 결단은 법규범과 구별된다. 그리고 …그 권위는 결단이 법을 창조하고 법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다」69)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정치적 결단의 이론적 개념은 바로 그 결단이 새로운 정치상태를 만들기 위하여 종래에 타당하던 법에 반하는 「권력」으로서 실행된다는 점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규범 또는 규칙은 질서를 창조하지 않고 오히려 현존질서의 토대 위에서, 그리고 그 질서의 범위 내에서만이 비교적 사소한 정도의 그 자체 내에 자주적이고 사태로부터 독립한 효력을 가지고 있는 일정한 조정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70)이기 때문이다. 칼 슈미트가 초법적인 권력을 계속해서 「법학적으로」 표시하는 원인은 「사회학」에 대한 그의 반감과 관련한다. 「만일 우리가 그 예외는 하등 법학적 의의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사회학이라고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회학과 법학의 도식적인 분리에 교양없이 위탁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슈미트가 잘못 생각한 바와 같이, 법학적인 「의의」는 전혀 문제되는 것이 아니고--이는 누구한테도 의심받고 있지 않다--그에 관련된 어구가 법학적인 것에 속하는 것인가의 여부가 문제이다. 이 어구는 정치적 결단주의의 이론상 「실정적 규범」을 법학적 기본개념의 몰규범적 반대개념으로서 간주하는 까닭에 법학상 이를 합법적인 권력으로서 보는 함축성있는 분류를 일탈하고 있는 것이다.

  『법학적 사고방식의 세 유형』이라는 논문에서도 전문용어의 부정확성이 완전히 지양되지 않고 있다. 이미 제1명제가 법률학(법학)과 정치적 현실 전체로서의 모든 국가 (또는 민족)학을 혼동하고 있다.71) 즉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법률의 개념을 자기 연구의 기초로 하고 있는 법학자는 모두 이 법을 규칙으로서 파악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결단으로서, 또는 구체적인 질서와 형성으로서 파악하는 것」이라고 한다.72) 이른바 질서사상과 형성사상을 결단주의와 마찬가지로 「법학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말하는 점에 바로 오류가 존재하는 것이다. 법에 대한 질서라는 범주의 참다운 기능은 법학적 개념들의 사용가치와 해석력의 제한성을 노출시킴에 있는 것이며, 이의 해결은 구체적 질서로부터 결과되어야 하고, 또한 법을 정치적 통일체와 모든 현실의 하나의 구성요소(主因)로서 규정지워져야만 한다. 즉 「규칙은 구체적 질서사상에 대한 질서의 한 구성요소이며 한 수단에 불과하다」.73) 모든 사회적 공동작업에 필요한 규범적인 노동법제와 경영법제가 경영공동체와 같은 구체적 질서에 속하는 것임은 명백하다. 그러나 공동체를「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당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경영공동체는 그의 법적 존재에서 문제가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적어도 동시에 경제적 통일체이다. 결국 슈미트도 역시 그가 다음과 같이 논술하고 있는 점에서 이 사실을 생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결혼에 있어서의 남편, 가정에 있어서의 식구, 친척에 있어서의 친척 소속, 어떤 신분소속원, 국가의 공무원, 교회의 성직자, 직장동료, 군대의 병졸은 미리 규정된 법규의 기능주의로나 또는 계약규칙으로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74)

 

3. 한스 켈젠의 순수법학비판(규범과 결단)

 

  결단과 규범이야말로 칼 슈미트 정치이론의 기초가 되며 또한 그의 대립관계에 동지와 적의 이론의 내재적 생명성이 존재하고 있는 양 기본개념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치적 결단주의의 반대이론인 자유주의적 규범주의 적어도 이 규범주의의 학문적 완성이라고 할 순수법학의 전제들을 몇 마디 말로 현실처럼 표현하지 않고서는 정치적 결단주의의 철저한 구명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슈미트의 논쟁적인 반대개념의 완전한 의의와 성질을 이해할 수 있다.

  켈젠은 한편으로는 국가를 사회내의 인간집단으로 규정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를 법적 범위의 「영토단체」라고 하는 「국가양면설」(Zwei-Seiten-Theorie)이라는 (당시)「지배적인」(1922년!) 견해가 내포하고 있던 법과 국가와의 관계에 관한 비판적인 고찰을 시작한다.75) 이러한 사회적 현실의 분류는 자연과학의 전형에 따라서 획득된 인과법칙적인, 따라서 존재판단을 형성하는 개념적 방법과 「국가의 사회이론」에 부합하는 것이다.76) 이에 반해서 법은 규범의 개념 중에 속한다. 즉 그것은 규칙이며 당위판단을 표시한다. 종래의 해석에 의하면 (켈젠의 표현에 있어서의) 국가란 법을 단순한 당위로부터 존재로 형성하기 위하여 법의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힘, 권력 또는 폭력이라는 것이다. 켈젠은 인간집단의 본질규정을 추구함에 있어서 국가를 사회학적 인과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일반적이며, 그 자체 논리정연한 존재와 당위를 양분시키기 위한 국가사회학과 국법학이라는 2원론을 지양하고자 하는데에만 노력을 집중하는 것이다.77) 그렇게 함으로써 켈젠은 (법질서로서의) 법학적 국가개념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전통적인 국가와 법의 대립은 순수법학에서 이 양자를 동일시 함으로써 지양된다. 만일 국가가 규범이고 「결사」나 「집단」이나 또는「단체」가 아니고, 법이 순수당위 또는 실증적 당위라면 이 양자는 동일한 「규범적 질서」의 범주에 속하며 「국가의 개념규정은 법을 정의함으로써 끝나는」78) 것이다. 다음의 전제들이 이 法命題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즉 (ⅰ) 존재(자연적 현실)와 당위의 철저한 분리 (ⅱ) 법은 당위의 부분영역이다. (ⅲ) 자연과학적이며 사회학적인 국가의 정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가를 당위질서로서 해석하고 또한 이 질서 내의 법으로서 해석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근본명제가 제기된다. 즉 (ⅰ) 어떤 규준을 통해서 법질서나 국가질서는 (언제나 규범적인) 윤리로부터 구별되는 것인가? (ⅱ) 법적 당위의 경험적 현실내에서의 논증은 어떤 방법으로 생기는 것인가?

  켈젠은 규범성의 두 가지 종류를 구별함으로써 첫째 문제를 「풀고 있다」. 즉 윤리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윤리와 도덕 속에 지니고 있는 규범성과 자연법이 혼동하고 있는 바와 같이 도덕의 체계와 혼동되어서는 아니될 제2의 「몰가치적」인--이러한 표현은 켈젠에 있어서는 이와 관련해서 발견되지 않지만--「법적 당위」라는 규범성을 구별하는 것이다. 물론 좀 더 광범한 논증은 규범과 현실에 관한 제2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로부터 (표면상 및 현실적인)「擬制들과 규범성」에 대한 슈미트의 투쟁을 구명함에 적합하다. 사실상 한편으로는 규범과 결단, 다른 한편으로는 법적 규범의 특수한 징표에 관한 토의의 공통적 요점은 규범과 현실의 문제에 개재하고 있다.

  엄격한 「방법의 순수성」과 그 자체 내에서 「완결된」존재와 당위의 여러 영역을 분리하여 생각하려는 비인 법학파의 기본적인 의도에 따라서 켈젠은 「타당성과 실효성의 평행관계」를 구축하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현실생활, 즉 사실상 인과법칙에 따라서 행하고 있는 인간행위의 단편은 어떻든 그 특수규범적 법칙성내의 국가질서나 법질서의 이상적 체계에 종속하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79) 켈젠은 이것을 일컬어 규범의 「실증성」이라고 한다. 전혀 상이한 종류의 결합으로서 법적 당위를 통하여 특징이 표시되는 요소들의 결합이 자연적 존재에 기초를 둔 인과적 결합으로서 주장됨으로써 당위로부터 「현실화」에 대한 모든 관계까지도…배제되는 것이다.80)

  그런데 규범적 범위 내에서 법(또는 국가)는 무엇인가를 명령할 수 있는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까닭에 특수지위를 차지한다. 물론 권력이나 강제는 외연적이고 물리적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생각될 것이 아니라 「당위질서의 내용이나 규범내용으로서」 생각되어야 한다. 「국가는 어떠한 조건 하에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일정한 강제질서를 행사하여야 할 것인가를 규정하는 규범체계의 통일체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강제가 또한 사실상 행사되는가, 그리고 어느 정도로 사실상 행사되는가는 별 문제인 것이다」.81) 만일 우리가 켈젠에 있어서와 같이 규범적 영역 내에 머무르고자 한다면 규범의 「효력」은 겨우 그 규범이 윤리적으로 의무를 부과하고 확신시킨다는 의미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켈젠에 있어서는 실정적 규범만 해당한다. 즉 현실적으로 통용하는 그와 같은 실정적 규범만 해당한다. 그 규범은 정당하게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통용하는 것이 아니고 합리성, 정의 등과  같은 성질을 고려함이 없이 다만 그 규범이 실정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통용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돌연 당위는 끝나고 규범성은 사라진다. 그대신에 조잡한 사실성의 반복이 나타난다. 즉 어떤 것이 통용할 경우 적용하기 때문에 그것은 통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증주의」이다.82)

  이른바 實證性은 정치적(국가적) 생활을 고찰함에 있어 그 이론을 몰가치적으로 구성하기 위하여 윤리적인 여러 원칙으로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부분적으로는 그의 반대이론인 비규범적(normfremde)인 결단주의처럼) 법학적 실증주의의 내적 구성과 그에 고유한 체계적인 결론은 우리가 그 실증주의를 궁극적으로는 「탈정치화」와 「중립화」를 주장하는 이론들에 속하는 것이라고 파악할 경우에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법학적 실증주의는 「중립적 범위를 추구하는 효력」에 적합하다. 20세기의 유럽인은--칼 슈미트가83) 실질적인 진리내용을 음미하지도 않고 법규사유와 결단사유의 정신사적 배경을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가 그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바와 같이--「논쟁이 단절되고 우리가 소통하고 일치하고 또한 반대로 확신할 수 있는 중립적 영역」을 추구하였었다. 그 「과정」은 신학적인 영역에서 출발하여 형이상학적이며 휴머니즘적 도덕적인 영역을 지나 경제적인 영역에로 이동하고 있다. 경제적인 시대말에 유럽 세계는 다시 정신적 혼란상태로 붕괴하지 않기 위한 협조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초기술적인 문제와는 떠난 순논리적 체계적인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 (광의에 있어서의) 기술--이 점에서 우리는 슈미트의 표현을 초월한다84)--에서 협조의 문제를 발견해내었다고 생각한다. 법학적 실증주의도 모든「초법학적인」 즉 세계관적, 정치적, 경제적…관점을 무시하고 모든 일을 법규에 포섭시킴으로써 만족하는 그의 해석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바로 이에 속한다. 그 이유는 「모든 규칙, 모든 법규적 규범화는 모든 경우를 규정하기 때문이다」.85)

  슈미트가 규범주의에 논쟁할 경우 그에 있어서는 그 자체 세 가지 방법, 그러나 현실상으로는 두 가지 방법만이 존속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슈미트의 정치적 결단주의의 2원적 상태로 말미암아 규범과 결단의 종합의 가능성을 제거한다. 그와 같은 이론은 실체적 통일체 내에 존재하는 몰규범적인 것도 아니요 비권력적인 것도 아닌 구체적인 정치적 현실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첫째로, 규범과 결단이 자립적인 「존재」일 수 있는 권능을 단지 정치질서의 극단으로서만 승인하고 둘째로, 규범과 결단을 모든 정상적인 정치적 「통일체」의 구성요소로서 결정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이론은 무실체성을 그 공통적인 기초로 하고 있는 가치 중립적 태도의 내재적 절망성과 같은 권력의 숙명론을 극복한다.86)

  그리하여 슈미트는 실정규범의 윤리적 기반을 분석함으로써 그 규범의 효력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의 논리적 체계의 일반적인 규범적 단계구성이 이를 그 실체적인 정치적 내용으로 적절히 파악하지 않고서도 모든 현실에 이용될 수 있다고 보는 점에 그 이론적 본질이 존재하는 켈젠의 정치적 不可知論에 반하는 결단의 권력을 활동영역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 중 양자택일의 입장에 당면한다. 이에 관련하여 칼 슈미트는 그의 『헌법이론』에서 모든 규범은 규범을 정하는 힘 (권력)으로부터 나오며, 또한 이 권력의 의지에 의하여 제정된다. 이 「의지」라고 하는 말은 단순한 규범과 대립하는 당위의 기원으로서의 존재적인 힘을 표현하는 것이다. 의지는 실존적으로 현존하는 것이며, 그 의지의 힘 또는 권위는 그 의지의 존재에 있는 것이다. 어떤 규범은 그것이 정당하기 때문에 통용할 수 있다. 그로부터 체계적 귀결은 자연법으로 되고 실정헌법으로 되지 않는다. 또는 어떤 규범은 그것이 실정적으로 명령하는 것인 즉, 존재적인 의지의 힘인 까닭에 통용하는 것이다(S.9). 명백한 입장은 처음부터 『헌법이론』과 마찬가지로 인용된 다음 명제로부터 유래한다. 즉 「규범은 그 자체 스스로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없다. 그 규범의 효력은 그 규범을 포고한 사람의 실존적 의지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다」(S.90).

  칼 슈미트는 충분히 규범의 윤리적 구속성을 암시하고 있으나 이는 결단개념이라는 광범한 고안에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특히 슈미트는 규범 (또는 결단) 의 통일체, 즉 의지와 규범의 본질적 결합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슈미트는--최후로 『법학적 사고방식의 세 유형』(1934년)87) 속에서 항상 법학적 실증주의라는 의미에서 (실정적) 규범을 말하고 있다. 그는 「전체」규범에 대해서 구성적인 이념적·규범적 내용이 기술적·실제적 필연성 이외에 그 규범의 기초를 이루어야만 한다는 것을 고려치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법은 「상황법」(Situationsrecht)으로 되고, 또한 무제한하고 예외없는 그와 같은 법으로서, 변화하고 있는 「지위」를 결과시키며, 그러므로 내재적 계속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동시에 정의의 논리적 요소라는 특수한 규범적 핵심은 이데올로기적 위장의 수단으로 타락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슈미트는 결단주의적 사상세계에 결정적인 두 논문, 즉 『정치신학』과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이러한 결론을 완결하였다. 결단주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적 공동생활은 지속적인 권력「투쟁」을 그 본질로 한다. 그런데 이 권력투쟁은 「구체적 무질서」를 전제로 하며, 이 구체적 무질서는 결단에 의해서 극복되고 질서를 초래하게 된다.88) 이에 대해서는 「결단되는 것 (즉 결단되는 방법은 아니다)」89)이 문제로 되며, 또한 규범을 이데올로기로 전락하는 것이다. 즉 「의제들이나 규범성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이러한 동지와 적의 「구별의 존재적 현실성과 실재적 가능성이 문제되는 것이다」.90) 즉 순수한 결단사유를 위하여 법을 인용하는 것은 모두 권력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법을 증명하는 논증은 승화된 算定에 불과한 것이며, 그 논증의 증명력은 곧 당면한 순간에 있어서의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다.91)

  그럼으로써 슈미트의 비판은 실로 법에 대한 권력(결단)의 초규범적인 요인들의 본질적 기능을 극복시킴에 족할 정도로 설명하고, 그러나 법규사유의 제2 전제인 가치중립적 태도를 그의 특유한 실정적 해결에 있어서 함께 신성시하여 받아들임으로써 부분적으로만 법학적 실증주의를 동요시키고 있다. 정치적 결단주의도 「중립화」를 추구하는 시대의 한 특징적 현상인 것이다.

 

제3장 決斷理論의 批判과 評價

 

1. 반대명제로서의 결단, 결단개념의 2원적 구조, 즉 당위와 존재의 분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결단이론의 핵심은 규범개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의지」에 있는 것이다. 슈미트의 설명은 몰규범적인 결단 또는 권력이 문제가 된다는 것에 관하여 의심할 여지를 없게 한다. 그래서 그는 헌법제정권력에 대하여 「헌법은 그의 정당성이 그 규범의 효력인 규범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헌법은 정치적 존재로부터 대두한 자신의 존재의 방식과 형태에 관한 정치적 결단에 입각하고 있다. 의지라고 하는 용어는--모든 규범적, 추상적 정당성에의 종속과 대립하는--이러한 효력근거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92)고 한다. 한때 다음과 같은 함축성있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즉 「의지는 이를 합리적이며 정당한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현존하고 있는 것이라고 실증할 수 없는 것이다」.93)

  이 명제들은 추상적 규범주의에 대한 논쟁으로서는 매우 정당한 것이나,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결단으로서 보는 이 명제의 고유한 명제는 바로 대단히 일면성을 지닌 것이다. 규범주의에 대한 모든 정당한 이론을 제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단론은 여전히 그의 반대이론의 비현실적인 전제에 입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양 이론은 그 사유구성에 있어서, 즉 2원적 비변증법적으로 정치현실을 파악하는 점에서 일치한다. 정치적 「존재」론도 추상적 규범논리주의도 정치적인 것의 한 요소를 절대화하고, 그리고 존재와 당위의 추상적 영역의--고의적이거나 또는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는--논리적으로 완벽한 분리와 구별결정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와 같은 연구의 큰 공적과 불변적 가치는 개념적 준비공작으로서 「사회생활의 요소들과 같은 것을 밝혔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고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층 중대한 관련을 이루어 존재하는 여러 요소들이 존재한다. 물론 그 요소의 본래의 본질은 우리가 실존 하에서 존재와 감각, 그리고 가치의 관련성을 하나로 이해하는 한 바로 그의 비실존성(Nicht-existenz)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단순한 추상적 존재에 있는 것이다. 이 요소들은 그를 추가함으로써 사회조직이 생기지 못할 정도의 광범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그 요소들의 결합방식에 관한 문제가 바로 고유한 문제를 이루는 것이다」.94) 「현실주의적 공동사회의 사유」(프라이어[H. Freyer])95), 또는 칼 슈미트가 말한 바와 같이, 구체적 질서사상과 형성사상의 불가결한 전제와 특수한 방법인 변증법적 고찰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것의 문제는 그 요소들의 격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규범의 결합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순수한 결단을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라고 말할 수 없다. 모든 결정이 단순한 폭력만의 정치적 예외현상을 도외시한다면 반대로 어떤 것을 위한 그리고 어떤 것에 대한 결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현되어야 할 하나의 계획, 이념, 또는 욕구하는 상태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정치적 결단이 가치와의 명백한 관계가 없을 것 같으면 그 결단은 무의미한 폭력으로 전락되고 이는 부단한 무장적 해결을 초래하나 하등 질서를 이루지 못한다. 그 이유는 정치적 결단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것의 본질에는 필연적으로 이른바 필연성과 의제가 귀속하고 있는 것이다.96) --여기에서 우리는 슈미트가 결단주의적 사상범위를 벗어나고 있는 그의 저서인 『국가의 가치와 개인의 의의』(1914년)에서 아주 확정적으로 비규범적인 권력이론에 반대하였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48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전혀 실제의 폭력은 어떠한 점에서도 정당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규범을 전제치 않고서는 어떠한 종류의 정당성에도 고양하지 못하는 것이다」. 후에 규범과 의지의 관계, 법과 국가의 관련은 사라져 버렸다. 독재 연구(1921년) 이후에 슈미트는 규범과 법률(규칙)을 동일시하고, 그리고 그로써 완전히 때때로 권력을 규정하는 위급존망의 시로부터 생기는 정치적 상태의 법학적·기술적인 합법화의 특색을 표시한다. 그로부터 규범의 해석은 규범성 의제 또는 그의 부패형태인 이데올로기로 변경되고 말았다.97)

  구체적으로 보면 결단은 명령으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정치적 결단주의는 정당성의 기초가 없는 개인적 독재의 이론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많은 이론적 연구로부터 그리고 풍부한 실제적 경험, 특히 최근년의 실제경험으로부터 「사회적 일상사에서 지속적으로 작용하고자 하는」 정치적 지배의 모든 형태와 마찬가지로, 권력을 위한 투쟁도 「내적 강제와 외적 강제의 동시적인 작용을 통하여 제약당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 「단순한 총검의 강제」는 「사회학적 극한의 경우」인 것이다. 「정치적 지배」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그 지배기구의 행위가 합법적으로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98) 그 경우에 해당 국가형태는 무의미한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국가는 명령을 내리고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슈미트가 명목상으로 언제나 몰규범적인 예외경우를 특수한 것으로 구성할 경우, 그것은 모든 정치적 통일체가 상위와 하위,99) 또는 명령과 복종 위에 구성되고 있는 까닭에 한편으로는 정당화되지 않는 물리적 강제의 실존적 가능성을 가진 권위적 명령도, 다른 한편으로는 확신없는 맹목적 복종을 그처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지배는 결코 그와 같은 관계에 입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국가의 권력 자체는 인간에 의해 표현되고 행사되는 까닭에 단순한 명령만을 초월하여 동시에 내재적으로 확신되어야 하며, 또한 복종하는 사람의 합의를 고려하여야 한다. 물론 잠시동안 자기 지위를 보유할 수 있는 순수한 자의나 힘에 의한 지배로부터 정상적인 지배와 합법적인 명령은 그의 가치와 (또는) 그의 필연성, 즉 내적인 정당성 또는 합법성의 확신을 통하여 구별된다.100)

  유사한 방법으로 그 밖에 가치있는 개별적 증명이 풍부한 전쟁에 관한 詳說, 즉 가장 강렬한 적의 집단화에 관한 상설이 보완되어야 하며 정정되어야 한다. 칼 슈미트에 의하면 정치적인 것의 정의에 대해서는 전체로서의 전쟁상황의 원칙만이 문제로 된다. 이 원칙은 결단의 힘이다. 「정치적인 것은 다시 그 자체의 기술적·심리적 및 군사적 법칙을 가지고 있는 투쟁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실재적 가능성에 의하여 결정되는 내용, 그에 의하여 규정되는 독특한 상황의 명확한 인식 및 동지와 적을 정확하게 구별하는 과제에 있는 것이다」.101) 전쟁의 개념에 있어 본질적인 것은 전쟁이 무장적 물질적인 설명을 표현한다는 것이다.102) 정치적인 것의 「정신적」 또는 규범적 정의가 결하고 있음은 곧 명백해 진다. 그 이유는 「『순』신앙적이며 『순』도덕적이고, 『순』법률적이며 또는『순』경제적인 동기들로부터 발발한 전쟁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103) 그러나 우리는 슈미트와 반대로 「정신적」전쟁의 의제가 생명력있는 인간의 존재에 위반함과 마찬가지로 신앙, 확신, 이상과 같은 비「존재적」인 (비물질적인) 요인들이 없을 것같으면 전쟁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하여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실로 인간 자체가 목표로 삼아 투쟁하여야 할 이상과 계획인 것이 아니라 「타존재를 존재상 부정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하는 이의의 가능성은 슈미트의 개념을 전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슈미트는 존재하고 있는 정치적 통일체인 국가를 완전히 결단력이라고 하는 정치원칙으로부터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104) 이에 반하여 우리들에게 있어서 투쟁적 통일체는 추상적인 이념의 담당자도 아니요, 물질적 현존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며, 이념도 아니고 규범도 아니며, 단순한 「존재」도 아니다. 그의 물질적 존재기반이 위협받지 않거나 또는 전쟁을 위한 전쟁, 즉 타민족을 근절시키고자 하지 않는 한 이상에 대한 순수한 사랑에서 타민족과 싸울 민족은 존재치 않는다. 자기존재의 방어도 자연적 존재의 확보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방어는 육체적 존재, 그리고 문화적·문명적 창조와 그의 가치에 관계하는 것이다. 바로 그의 공통적 실체가 종족이라는…민족의 구체적인 정치단체내에 존재하는 「이념」과 권력이 공존하는 것이다.105) 이의 동기들(구성요소)의 일면적 증대는 구체적 질서를 파괴하고 그 대신에 다소의 추상적 원칙들인 「규준들」을 세우게 된다. 칼 슈미트의 정치이론의 한계는 부분적인 현상을 적절하게 기술하고 강조하였으나 동시에 다른 여러 요소를 없애버렸다는데 바로 그 이유가 존재한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전체가 그의 특수한 정치적 존재가 전쟁으로 나타나는 단순한 권력담당자로 화해 버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확신이 이데올로기적 자의로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동지와 적의 이론에 대하여 숙고하는 바는 세계관적인 권력부정을 초월하는 것도 아니요, 우리가 규범과 결단의 대립을 납득하기 위하여 「규범과 결단을 대립」시키는 이원적---또는 신들러(Schindler)가 언급한 바와 같이, 「일차원적」--- 인 사유로 표시되는 방법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목적은 실질있는 구별로서, 이론상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실질상으로는 결과가 중대한 규범과 결단의 분리를 극복하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규정」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결단과 규범성의 대립 속에서는 존재와 당위의 일반적인 이원론, 좀더 정확히 말하면 자연적인, 즉 물리적 힘에 의해서 규정된 존재와 규범으로 충만된 당위의 비변증법적 대립이 부흥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치적인 것, 즉 비규범적인 충돌시의 결단은 자연적 존재이거나 단순한 권력이다.「이 분리사유의 근거는 자유주의의 특징을 표시하는 추상화에의 능력인데 이 능력에는 구체적 통일력이 결여되고 있다」. 「자유주의적 분리사유는 단순한 대립을 고집하고 작용하고 있는 공동질서 내에서의 객관적 구별을 파악할 힘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106)

  의지와 규범, 국가와 법률, 이념과 존재 (슈미트는 「규범적」=「실존적」)107)이라는 특징적 대립을 내포한 존재와 당위의 이원론은 정치적 현실을 두 개의 상이한 근본상태에로 구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법률들이 불변적인 「상황」의 결과로 말미암아 대저 스스로 기능하고 다종다양한 사건이 일반적 규범에 비례되고 종속되는 다소 비정치적인 규범적 경우가 한때 존재하고, 그 다음에 인간이 그의 존재적 의지에 의하여 동지와 적으로 구별되는 충돌의 경우도 존재한다. 이러한 상태는 무력적 전쟁의 경우에 그 최고의 정치적 강도에 달하고, 다만 F.비이저(Wieser)의 「힘의 법칙」에만 굴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야말로 바로 정치적 상태인 것이다.

  경험상 몰규범적이며, 몰법규적인 상태가 존재함을 아는 한, 이에 대해서 반대할 여지는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남는다. 첫째로, 모든 예외상태는 몰규범적인 것인가 아닌가? 즉, 이 질문은 윤리적 규범과 법규(=실정적 규범)의 구별을 고려하여 모든 경우가 비록 몰법규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몰규범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답변할 수 있다. 그리고 둘째로, 단지 현존하는 것만으로서 그와 같은 시간과 순간을 특수한 정치적인 것으로서 고양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존재한다. 반대로 우리들은 어떤 민족, 어떤 국가…의 「규범적」 「헌법」108)만이 정치적인 것의 본질에 관한 것을 말할 수 있음을 타당하게 만드는 데에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바로 칼 슈미트 자신이 이미 결단주의적 논문 계열에 속하지 않는 그의 최근의 저서109)에서 「규범적 상황」과 법적·정치적 생활의 「전형적」인 「형태」를 택하기로 결심하였다. 모든 2원론과 마찬가지로 정상과 비정상의 대립 역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적 출발은 규범과 결단의 단순한 대립을 파기하는 「제도적 양식들」 (또는「구체적 형태」)과 더불어 부여된다. 「순수한 규범주의자가 비인격적인 규칙 속에서 사유하고 결단주의자가 정당하게 인식된 정치적 상황의 훌륭한 법률을 실행하는 반면에 제도적 법사고는 초개인적 제도와 형성내에서 전개되는 것이다」.110)

 

2. 具體的 秩序, 規範 및 決斷. 「存在」와 「生成」에 대한 관계, 현재의 정치적 현실과의 관계

 

  슈미트가 「형태」나 「질서」에 관하여 실질적인 설명을 하는 대신에 규칙사고나 또는 법규사고에 대하여 순비판적으로 구체적 질서사상을 구별함으로써 만족하고, 또 나아가서 동태적 힘으로서의 결단을 정태적 질서(또한 규범)와 대립시킴으로써 제2의 2원론, 즉 존재와 생성, 정태와 동태의 2원론을 통하여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복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법학적 사고방식의 세 유형에 관하여』라는 결단주의 이후의 것에, 우리의 새로운 법률사고와 정치사고의 방향을 지시해 주는 논문에서마저도 대립적 항의적 논쟁방식은 모든 정신적 잔재력과 더불어 작용하는 것이다. 즉 「평화와 안전과 질서를 주는 자는 주권자요 그가 모든 권위를 가지고 있다. 진정하고 순수한 결정으로써 이러한 질서의 생산은 기존 규범의 내용이나 기존질서로부터 유래될 수 없는 것이며, 규범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통용하는 규범의 단순한 자기적용이거나, 구체적 질서의 사고에 의한다면 기존질서의 유출물이며 질서의 재생산이며, 질서의 생산 그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주권자의 결정은 법률적으로 하나의 규범으로부터도 하나의 구체적 질서로부터도 설명될 수 없으며, 또한 구체적 질서의 범위 내에 관련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와는 반대로 결정주의자들에게는 결정만이 최초로 규범과 질서를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권자의 결정은 절대적 시원이며, 그 시원은 주권자의 결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S.28[역서, 236∼237면]). 「존재」로서의 구체적 형태를 결단으로서의 생성에 대립시키는 것은 오류이다. 한편으로는 정상적으로 대립적인 정태적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질서는 언제나 「현실화」되어야 하고, 그 경우에는 스스로 교체하는 결단주체의 가변적인 의지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어떠한 순수결단도 새로운 것을 초래하지는 못하고 또한 강력하게 기존의 것을 확고하게 함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존재와 생성은 사실상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상호 변증법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존재와 생성은 동일한 정치적 담당자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결단과 구체적 질서의 2원론은 지양되는 것이다. 그러면 규범과 결단은 존재와 생성의 문제에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인가?

  우리는 위에 든 두 개념을 구명하기 위하여 슈미트가 규범을 몰가치적인 법의 특수형태로 파악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전제 하에서 우리는 결단이 경험적 시간적 및 논리적으로 (새로운) 규범보다도 선행하고 따라서 동태적인 원칙을 구체화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즉 결단은 전쟁에서 비로소 새로운 법률을 창조하는 (이 종래의 행동과 비교하여) 혁명적 행동을 통하여 언제나 그때 그때의 새로운 상황을 규범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제까지 타당한 법질서를 단절하는 것이다. 그러나 규범이 법적 규범화라는 의미로 변화하지 않고 현실화를 대망하는 이념을 표현한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문제상황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그 경우 규범은 혁명적·동태적 성격을 지니게 되며, 건축의 설계도가 건축 (예컨대 가옥 그) 자체에 선행하는 것과 같이 차후의 타당성을 가능케 하는 권력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 명제는 규범을 정태적인 것을 대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반대로 이와 같은 증명력으로 말미암아, 무릇 모든 2원론적인 분리가 동수의 논증과 반대논증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태는 결단주의적 존재에 귀속하고 동태는 규범적 가치에 귀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단주의가 자립적인 근본방식, 더 엄격한 의미에서는 정치적 사고의 근본방식을 표현할 경우, 원래 모든 결단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지속을 바라는 논리적 요소를 만족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실질적 통일체와의 관계없이 정치적인 것을 해석한다면 결코 정치적 행위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할 것인지를 확인할 수 없게 된다. 동지와 적의 이론의 저자 자신도 결단이 언제나 「순간을 논점으로 만듬으로 말미암아 모든 대정치운동 속에 내포되어 있는 안정적 존재를 간과할」111) 위험에 서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역사는 단순한 결단으로서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역사를 일련의 요점적인 예외상태로 분해하는 것인데, 이 상태의 총화나 누적은 결코 그의 지속성이라는 의미에서의 「역사적 사건」의 통일을 결과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역사란 바로 역사, 즉, 그 자체로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것, 즉 민족, 국가, 종족 등의 시간적 경과인 것이다. 달리 정식화하면 우리는 어떠한 실존적 권력 자체도 인식하지 못하나 권력으로 규정된 통일체들은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론의 시금석을 이루는 정치현실에 적용하여 보면 의미심장한 결단주의적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판명된다. 칼 슈미트에 의하면 「정치적 통일체의 세 가지 범위와 요소(국가·운동·민족)는 세 가지의 법학적 사고방식(규범주의, 결단주의, 제도주의)에 종속된다」.112) 『국가·운동·민족 ---정치적 통일체의 세 요소』(S.11 ff.)라는 그의 논문 속에서 국가, 즉 S는 정치적·정태적 부분을, 운동 (그의 조직들을 가지고 있는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은 동태적 요소를, 그리고 민족은 정치적 결단의 비호와 보호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정치적 통일체의 「비정치적 측면」을 표현하고 있다. 국가 (즉, S)는 국가의 관청제도와 관직제도를 통해서 표현되며, 군대와 국가적 관료제도로서 구성되며, 운동은 정당을 통해서 표현되고, 민족은 직업신분적인 경제질서와 사회질서 및 지방 공공단체 내에서의 자치로서 표현된다. 여기에서 관심사가 되는 것은 이 세 요소 간의 논리적 구조이다. 이 요소들은 예외없이 실재하는 「제도들」이며, 특히 결단주의적=동태적 힘인 정당은 「구체적 질서와 형성」의 범주에 속한다. 그 결과 슈미트는 부득이 구체적 질서를 기본적 정치적 범주에로 고양한다. 따라서 「종래의 결단주의적이거나 규범주의적이거나 또는 이 양자를 결합하는 실증주의적인 법률사고는 이미」변화한 정치현실에는 「적합치 못한 것이다」.113) 따라서 그 간에 결단주의적 해결은 동지와 적의 이론의 저자에 의하여 극복된다.

 

3. 規範主義의 극복으로서의 決斷主義의 評價

 

  정치적 현실 특히, 이의 대변동은 형식법학적으로 기술될 수도 없고 설명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확신있게 논술한 것은 정치적 결단이론의 공적이다. 순수법학은 언제나 실증주의법학이 「국법은 여기서 끝난다」고 하는 안쉬츠(G. Anschütz)의 고전적 명제 내에서 자기 자신을 구출하지 못함(Hilflosigkeit)을 총괄할 경우 실증주의법학으로 구성하여 프로이센의 헌법쟁의를 해석할 때 생기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즉 실정적으로 타당하는 법규로서는 역사적 생활의 계속성도 얻을 수 없고 본질적이고 특수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결단주의, 즉 추상적 규범주의의 반대이론 자체의 온 범위에 걸쳐 적용된다. 결단주의적인 문제의 해결도 완전한 정치적 현실을 파악하지는 못한다. 그 까닭은 그것은 방법상 그릇된 이론적 출발점으로 말미암아 그 대상을 일면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결단사상의 전제가 인도하는 추론은 「정치적인 것」이 결코 「표지」로서는 「정의」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우리는 형식적인 개념규정을 포기하고 규범과 결단은 권력의 구성요소들이거나 또는 계기들이며, 이들로부터 규범과 결단은 그 개성을 얻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이 권력은 「정치적인 것」의 담당자, 즉 동지와 적의 구별의 주체로서--국가라고 하는 정치적 통일체의 구체적 형태로서 우리들에게 부여된다. 정치적 통일체의 내부조직은 어떠한 것이며, 그리고 이것은 무엇에 의하여 기타의 구체적 질서와 구별되는 것인가?

 

 

결 론 : 정치적 통일체와 구체적 질서. 민족적 정치이론의 필요성

 

 

  정치적 결단주의의 내재적 완결성에 반하는 칼 슈미트의 새로운 이론은 지금까지 단편과 부록으로 잔존하여 왔다. 구체적 질서와 정치적 통일체는 그 기초적인 것에 관한 두 개의 소책자 속에서 다만 암시적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설명 역시 단편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인 것」의 표지에 의하여, 즉 막스 베버(Max Weber)의 말을 빌리면, 물리적 폭력행사의 독점114)에 의하여 정치적 통일체를 기타의 질서들로부터 구별함은 용이한 일이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결단력은 정치적 통일체의 필수불가결한 징표를 이루는 것이나, 우리의 설명이 지적한 바와 같이 표지에 의하여 정의에 이르는 방법은 오류인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은 (슈미트의 의미에서)「정치적인 것」의 독립과 그로부터 생기는 분리를 골자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정치적 통일체의 본질을 일면적으로 예외상태의 상황으로 변화시키고, 또한 그럼으로써 敵對的 分析을 초래치 않는 공동생활의 현상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동일한 방법 또는 유사한 방법으로 법질서가 국가에게만 귀속되지 않고, 또한 국가는 단순한 법질서 이상의 것인 한에 있어서 「법질서」와 같은 다른 종류의 징표에 근거하여 국가를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지양된다. 다원론의 추론,115) 즉 국가는 다른 종류의 인간 결사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도출하려는 것보다 도대체 무엇이 더 접근하고 있는가? 가족, 신분, 조합과 마찬가지로 국가는…하나의 인간집단을 표현한다. 즉 「국가의 의사는 정부의 의사이다」.116) 그렇지 않으면 국가의 우위의 토대를 이루고 국가의 우위를 정당화하여 주는 구실이 아직도 존재하는가?

  다원론적 기본명제에 관해서는 그 명제의 결과는 인간적 통일체의 일반적인 병렬질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원론적 기본명제가 국가를 권력과 합법성에 대한 관계에 따라서 문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시도는 정당화된다. 그 이유는 구체적 질서로서의 국가는 실제적 인간의 지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으로서는 아직 모든 사회적 집단의 일반적인 등질성이 증명된 것은 아니다. 씨족, 소비조합, 교육단체들은 비록 모두가 인간결사임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매우 상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 결사들 중에서 국가는 특수한 지위를 가진다. 그 이유는 국가는 그 민족생활의 필요성에 따라서 민족 전체를 지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우위는 권력국가이론이 잘못 생각하고 있듯이, 국가 자체 내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국가가 자기목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적 행위의 기초실체, 즉 모든 특수한 생활질서에 관여하는 민족적 생활통일체117)라는 구체적 형태에서만 생기는 것이다. 슈미트 설명의 특유한 약점은 바로 민족을 전적으로 「비정치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점에 있다.118) 민족적 국가관이 국가의 실체에 대한 문제를 정치적 사유 일반의 요점으로 하고 있고, 그로 말미암아 반대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정치적 다원론의 극복을 가능하게 한데 반해서, 슈미트는 국가적 통일체 자체에 집착하므로 말미암아 분석에서의 핵심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국민전쟁과 대독일민족의 최고목적을 위한 국가사회주의의 의식적인 도박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실체없는 국가이론으로서는 독일 민족을 여러 국가적 결사에로의 분할을 초래하며 또한 독일 제국으로부터 버림받은 민족적 멸망의 영역을 인도하는 모든 그 치명적인 국가권력정치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해 주는 민주주의적 마르크스주의적 파시즘적 이론을 분쇄할 수 없다는 것이다.119) 아주 최근에 M. H. 뵘(Boehm)120)은 다음과 같은 경고적인 말을 하였다. 즉 「외국에 있는 독일 민족은 결코 독일 민족학과 아울러 국가학의 제2차적인 문제가 아니다. 외국에 있는 독일 민족의 3분의 1을 생각에 넣는 것은 아마도 포괄적인 독일민족학과 국가학에 부과된 최대의 임무일 것이다. 그것은 '현대의 정치적 현실과학'으로서 독일인들이 그 임무를 확증하여야 할 본래의 시금석인 것이다」.